고3 시절
갑자기 가슴 아래 명치가 뜨끔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그냥 엎드려 잠이 들었다가 손이나 발이 저려 깨기도 하지만 가슴이 뜨끔 거리는 증상은 처음이었다. 명치 부위이지만 위장이 이상한 거 같지는 않았고 뜨끔 거리는 게 멈추지 않고 몇 초에 한 번씩 생겼다. 기지개를 켜보고 일어나 움직여봤지만 증상은 계속되었다.
‘왜 이러지? 너무 가슴이 눌렸나? 점점 심해지네. 이거 이상한데’ 크게 걱정은 안 되었지만 멈추지 않는 증상에 얼굴을 찌푸리며 책을 보려고 했으나 이젠 숨 쉬기가 좀 힘들어졌다. 안 되겠다 생각하고 가슴을 움켜잡고 집으로 향했다. 걸을 수는 있었으나 상체를 펴기 힘들어지고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까지는 걸어서 약 5분 거리였고 골목길에는 주말 오후라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12층 아파트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을 열자마자 “엄마! 숨 못 쉬겠어!” 겨우 소리치고 가슴을 움켜쥔 채 앞으로 쓰러졌다. 마침 거실에서 동생이랑 나물 다듬고 있던 엄마는 혼비백산한 표정과 목소리로 “야야 뭔 일이고 응? 와 이카노?” 하면서 달려왔다.
가슴 사진을 찍고 기다리는 우리에게 의사는 “기흉입니다. 키 크고 마른 젊은 남자에게 잘 생기는데 원인은 잘 모르고 일단 폐를 누르고 있는 공기를 빼줘야 합니다. 가슴에 튜브를 박고 며칠 있어야 합니다. 지금 폐가 많이 눌려있어서 수술을 빨리 해야 합니다.” 카트에 실려 수술실로 옮겨졌다. 다행인지 아닌지 국소마취로 수술을 진행했다. 가슴 앞부분을 약 3cm 정도 절개하고 튜브를 삽입하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마취가 잘 되었는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튜브가 삽입되자마자 숨쉬기가 좀 편해졌다.
당시 우리 집은 T시의 변두리에 있는 12층짜리 아파트였다. 새로 형성된 아파트 단지들 주변으로 이제 막 개발이 되는 중이었는데 다행히도 중소형급의 병원이 집 바로 옆에 있어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집에 동생이 있어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용이했다.
가슴에 박힌 튜브는 마취가 깨면서 묵직한 통증을 느끼게 했다. 수시로 진통제 주사를 맞으면서 잠들었다가 깼다가 했고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놀라셨겠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란 듯 좀 느긋한 표정이셨다. 엄마는 계속 병상 옆을 지키셨다.
고3이었던 관계로 책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름방학 끝자락이니까 학력고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진통제를 맞아가며 공부도 했고 매일 가슴 사진을 찍었고 의사는 기침을 많이 해서 흉벽과 폐 사이의 공기가 튜브로 빠져나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간 입원 후 튜브를 빼고 퇴원했다. 가슴에 반창고를 잔뜩 붙이고 엄마가 해주신 닭곰탕을 맛있게 먹었다.
2학기 중간고사를 며칠 앞두고 기흉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명치가 뜨끔 거리는 증상은 심하지 않았으나 가슴이 계속 답답하고 점점 폐활량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증상은 서서히 2-3일 지속되었고 병원에 가 본 결과 재발이었다. 튜브를 박았던 그 자리를 다시 절개하고 튜브를 삽입했다. 중간고사 시험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학교에 전화해봤으나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섰다.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가 연결해준 학교 전화에 대놓고 크게 소리쳤다.
“아니 이 상태로 어떻게 학교 가서 시험을 치란 말입니까? 고3인 이 학생의 인생이 걸린 일인데. 게다가 지금도 병실에서 가슴에 튜브 꽂고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 애인데 뭔가 방법을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체육선생님이 시험지를 들고 오셨다. 사흘 시험기간 동안 매일 오셨다. 시험을 위해 1인실로 옮겼고 체육선생님은 시험 보는 침상 옆을 무료하게 지키셨다. 너무 미안했고 감사했다.
퇴원 후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난리였다. 병원에서 중간고사를 치르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니까. 친구들은 입원 중이라 들을 수 없었던 중요한 수업을 카세트테이프에 따로 녹음해서 들으라고 주었다. 감동적이었지만 다 들을 수는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체력장이 걱정이라고 했지만 무려 20점이 걸려 있는 체력장을 치르지 않고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진단서를 제출하면 총 6 종목 중에 3 종목만 치러서 기준을 넘으면 된다고 했다. 10월 초에 체력장을 치렀다. 중학교 시절 100미터 달리기 전교 1등의 실력을 내세워 100미터 달리기, 멀리뛰기, 던지기 3 종목만 했다. 33점 이상이면 학력고사 20점을 받을 수 있었다. 두 종목만으로 33점을 넘었다. 담임선생님은 끝나고 꼭 전화하라고 했다. 무사히 잘 끝냈다는 말을 들으시고 안도하셨다.
일요일 집에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왔다. 친척 결혼식에 다녀오시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집 옆의 응급실에 계신다고. 누나랑 동생이랑 다 같이 놀라 달려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오시다가 논두렁에 처박혔다고 한다. 친척이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다행히 큰 손상은 없었다. 아버지는 통원 치료해도 될 정도였지만 엄마는 두피가 다 벗겨졌고 열흘 정도 입원해야 했다. 머리에 압박붕대를 칭칭 감으신 엄마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맺혔다. “엄마, 걱정 말고 치료 잘 받으이소. 집 걱정 말고. 혼자 공부 잘할 테니까.”
키도 별로 크지 않고 마른 체형도 아니었는데 세 번째 기흉이 생긴 건 학력고사 치기 열흘 전이었다. 재발의 기미가 나타나긴 했지만 심하지 않아 병원에 가지 않고 망설였다. 한밤중이 되어서 빠른 속도로 숨쉬기 힘들어지고 상체를 펼 수 없었다. 이번에는 큰 병원에 가야겠다 싶어 부모님은 막내 외삼촌에게 연락했다. 대학병원에 전공의로 근무하는 외삼촌은 아침에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꼼짝없이 가슴을 웅크린 채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대학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은 많이 혼잡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세 번째라는 얘기를 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고 마찬가지로 튜브를 빨리 삽입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실에 가지도 않고 응급실에서 바로 시술했다. 이번에는 앞가슴이 아니라 옆가슴을 절개했다. 헐!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갑자기 좌측 옆 가슴을 찌르는데 이런 극심한 통증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봤다. 숨이 막혀 차마 큰 신음소리도 지르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 자동적으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숨이 터져 겨우 소리를 질렀다. 의사는 튜브가 안 들어가서 다시 해야 한다고 누우라고 했다. 마취가 제대로 안되었다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시술을 끝내고 촬영실로 가는 침대 옆을 따라오시는 엄마의 손에는 고함 소리를 들으셨는지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엄마! 죽어도 의대는 안갈랍니더.” 울지는 않았지만 거의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외삼촌의 친구들이 병실에 와서는 고3이라고 들었다면서 입원해 있다고 농땡이 피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 이깟 병은 아무것도 아닌 양 말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좀 지나면 콧김으로 약 냄새가 났다. 그 약 냄새를 맡으면서 책을 폈다.
학력고사를 3일 앞두고 퇴원했다. 시험은 그럭저럭 봤고 열심히 놀았다. 미팅도 하고 디스코텍도 가고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뻔질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당시 처음 개교하는 P시의 공대에 견학도 다녀왔다. 학교 시설도 훌륭하고 전액 장학금에 깔끔한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했다. 집을 떠나는 게 왠지 재미있을 거 같았고 어릴 때 꿈꾸던 과학자가 되는 상상도 했다. 원서 쓸 날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원서를 어디에 넣을지 묻지도 않고 소신대로 하라고 하시면서 원서비를 주고 출근하셨다. 법대를 졸업하고 몇 년째 사법고시를 실패하고 있는 둘째 외삼촌은 일찍이 의대에 가라고 조언했었고 원서 쓰기 전날 고1 때 담임이셨던 선생님은 공대에 가라고 하셨다. 선생님 집을 나서면서 네 알겠습니다 했지만 다음날 결국 엄마의 설득을 뿌리치지 못하고 의대에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지금 후회는 없다. 아마 공대에 지원했으면 재수를 해야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는 공대의 인기가 더 높았다. 공대에서 떨어지고 2지망으로 의대에 들어온 애들도 많았다.
그 이후로 기흉은 다시 재발하지 않았다. 세 번의 재발성 기흉으로 군대에 가지 못했다. 불과 3개월 만에 많은 일들이 예기치 않게 발생한 힘든 고3 시절이었지만 지나고 나서 별로 힘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비관하지도 않았고 누굴 탓하지도 않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나 생각해본다. 예기치 않은 수많은 일들이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주저앉게 한다. 고3 때처럼 누가 봐도 힘든 상황을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가 어렵다. 닥치는 일들을 그냥 마주하고 옛날처럼 무심히 관통해야겠다. 튜브가 내 가슴을 관통했듯이. 맞다. 인생은 관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