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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옥현 Jul 28. 2021

네 분의 담임선생님

5학년

   늦가을이었다. 이른 아침 책가방을 메고 아버지와 같이 걷고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화창한 날씨에 아직 춥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길들은 아직 낯설고 복잡했다. 내가 살던 읍내와 달리 대도시의 길들은 모두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으로 포장되어 있고 전봇대도 어지러이 길을 막고 있다. 큰길은 차가 쌩쌩 지나가고 어떤 길은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고 좁은 골목길들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가고 신호등도 몇 개나 건넜다.   

   

   5학년 말, 내가 전학하여 다시 다니게 될 학교는 집에서 여러 가지의 길들을 거쳐 가게 되어 있고 당장 오늘 학교가 파하면 혼자 그 길들을 따라 집으로 와야 한다. 혼자 다녀야 하니 잘 기억해야 한다. 원래 길눈은 밝아서 한 번 간 길은 잊어버리지 않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길눈이 밝고 아니고는 거의 선천적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측두엽 등에서 방향감각이 결정되는데 이 능력이 길눈을 크게 좌우한다. 길눈이 밝은 사람은 그만큼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고 주변 환경을 나도 모르게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나는 한 번 갔던 길을 잊지 않고 오래전 갔던 길에 들어서면 우리가 거기서 뭘 먹고 어디로 갔는지도 떠오른다.       

   내가 생각해도 5학년은 참 파란만장했다. 담임선생님이 무려 4번이나 바뀌었다. 학기 초에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로 막 부임해 오신 첫 번째 담임선생님은 젊으신 분이었고 아주 엄하셨다. 우린 학기 초부터 군기가 바짝 들었다. 말씀도 별로 없고 수업 시간에 자세 하나, 시선 하나 흐트러지는 걸 용서치 않으셨다. 당시의 군사정권 같은 느낌이었다. 칠면조 사육장(당시 읍내의 작은 학교였지만 칠면조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우리 반이 청소 담당이었다)을 청소하다가 친구랑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갑자기 운동장 집합, 그것도 학급원 전원 집합이 떴다.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고자질했을까? 아니면 그 먼 교실이나 교무실에 싸움 소리가 들렸을까? 싸운 것도 싸운 거지만 고자질도 집합의 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린 한동안 질서 정연히 부동자세로 운동장에 서서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서 있어야 했다. 맥아더 장군 같은 선글라스를 쓰신 선생님은 별말씀도 없이 우리의 눈동자만 쳐다보다가 해산시켰다. 아니, 짙은 선글라스 속의 눈동자가 어디를 주시했는지는 모른다. 우린 선생님이 원래 중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잠시 무슨 일이 있어 초등학교에 있게 된 거라 수군거렸는데 선생님은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셨다. 우린 또 수군거렸다. 거 봐 중고등학교로 다시 가신 거라니까. 근데 묘하게 그 엄한 선생님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뭔가 뜨거운 가슴으로 우릴 바라보았달까?   

  

   잠시 임시 담임 체제를 유지하다가 새로 오신 두 번째 담임선생님은 좀 미안하지만 할머니였다. 일순간 반 분위기는 급반전을 이루었다. 드디어 우리의 해방이 왔다. 군기는 급격히 빠지고 청소도 안 하고 튀거나 수업 시간에 떠들기도 하고 도시락도 까먹고 키 작고 목소리 작은 담임선생님이 화가 나시거나 말거나. 사실 좀 미안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쩌랴? 내가 아무리 화랑 어린이회 학급회장이라도 그 많은 학급원들의 아우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학기 초부터 응축된 장난끼들이 용암이 분출하듯이 하는데. 그러니 민초들은 누른다고 눌러지는 게 아닌가 보다. 언젠가는 터진다는 것이 정설인가 보다. 그러나 민초들이 너무 나대면 그것도 문제인가 보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개학을 하면서 바로 담임선생님이 또 바뀌었다.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이셨는데 우리 반 담임을 맡게 된 이유는 할머니 선생님의 의견이 컸을 걸로 보인다. 제발 좀 바꿔주세요. 반 분위기가 엉망입니다. 난 저학년으로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민초들이 적당히 했으면 바뀌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좋다가 말았다. 새로 오신 세 번째 선생님은 첫 번째 두 번째 선생님의 중간 정도이셨다. 나이는 지긋하셨고 풍채도 있으셨고 표정이 근엄하진 않았으나 가볍지도 않았다. 당연히 눈치를 보게 된다. 탐색전을 거치고 우린 조금씩 질서를 잡아갔다. 놀만큼 놀지 않았나 하는 것도 있을 거고 아무래도 남자 선생님에게는 대놓고 떠들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방학이 지나고 나니 한 풀 꺾이기도 했다.      


   난 원래 공부를 잘했다. 집중력도 뛰어났다. 3학년 때는 수업 시간에 여자였던 담임선생님에게 너무 수업에 집중한 나머지 손 들고 질문하면서 선생님이라고 한다는 게 ‘아버지’ 하면서 소리 질러 반 학생들이 모두 웃은 적이 있다. 한 동안 그 집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왜들 웃지 하고 있었다. 학교가 파하면 무조건 숙제부터 하고 놀았다. 친구가 놀자고 와도 친구 붙잡고 숙제부터 하고 놀았다. 수업 시간에 배운 걸 놀면서 복습했다. 나도 모른다. 그냥 놀고 있는데 수업 시간에 배웠던 게 생각나고 그걸 말로 하면서 외우기도 하고 그랬다. 놀기도 잘 놀았다. 4학년 때까지는 줄곧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성적도 좋았다. 시험지에 빨간 작대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험 기간에 따로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소 실력대로 시험 쳤다.    

 

   5학년이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시험지에 작대기가 점점 많아졌다. 애써 태연한 척했는데 엄마도 별반 얘기가 없으셨다. 이상했다. 학년이 올라가서 점점 어려워져서 그런가? 하지만 수업 시간에 이해 안 되는 건 없었다. 분량이 많아져서 그럴까? 그럴 만도 했다. 양도 많아지고 과목도 늘어났던 것 같다. 다른 원인도 있었을까?

   왜 그랬을까? 5학년 때부터는 집 밖으로 놀러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길눈이 밝으니 멀리 가도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난 우리 읍내가 이렇게 넓은 지 그 당시에 처음 알았다. 맨날 학교, 집 근처에서만 놀다가 그래 봤자 집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있는 강에서 멱질이나 하고 놀았는데 우리 읍은 멀리 산도 있고 시장도 있고 방천 따라 먼 곳도 있고 그 먼데도 친구들 집이 있었다. 멀리 돌아다니려니 날이 저물어서 친구 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다 늦은 저녁에 나타난 날 보고 놀라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 엄마는 야야 느그 집이 어딘데 이렇게 늦게 다니노 퍼뜩 집에 가거라 느그 엄마 걱정하실 낀데 하는 분도 계셨다. 집에 가도 놀 사람이 없어요. 우리 집은 텅 빈 거 같아요. 늦게 집에 가도 엄마는 야단치지 않았다. 할머니도 별반 말이 없으셨다. 늦게 온 나를 걱정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누나들도 동생도.      


   5학년 때, 집에서의 기억이 별로 없다. 다들 조용하고 그 넓은 집이 휑한 느낌만 남아 있다. 가느다란 기억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한 번은 엄마가 강아지 한 마리를 시장에서 사 오셨다. 평소 애완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그때의 엄마 표정을 기억한다. 엄마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희망이 나타나 있었다. 아마 그 표정 때문에 기억하게 되었으리라. 강아지가 잘 자라주면 우리 집도 잘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 아주 어린 기억에 우리 집은 넓은 마당에 세 마리의 개를 키웠다. 진돗개, 셰퍼드, 불독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 개들은 나보다 더 컸던 걸로 기억에 남아 있고 정말 멋있는 개들이었다. 셰퍼드는 달리기 대회에서 상도 탔고 그 상패들이 사무실 방 캐비닛에 있는 걸 보기도 했다. 불독도 사나웠지만 당시로는 정말 귀한 개들이었다. 개들은 마당 한 구석에 철창으로 된 큰 집에서 살았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정말 부유하고 잘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개들이 한 마리씩 죽어나갔다. 쥐약을 먹고 죽기도 하고 새벽에 차에 치어 죽기도 하고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변소에 빠져 죽기도 했단다. 개들이 죽어나가면서 집안이 기울었는지 집안이 기우니까 개들이 죽어나간 건지는 모른다. 아마 엄마는 그 개들을 키울 때 부유했던 집안을 회상하면서 강아지를 사 오셨나 보다. 하지만 그 꿈도 오래가지 못했다. 비실비실하더니 얼마 안 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엄마의 표정도 없어졌다.    

  

   상대적으로 학교에서의 기억은 많이 있다. 학교는 표정이 있고 친구들 모두 철 모르고 밝으니 집안 분위기는 잊게 되고 또 학생회장이니까 바쁘지는 않았지만 할 일도 좀 있었고. 선생님도 여러 번 바뀌면서 기억에 박혔다. 5학년 올라와서 학기 초부터 좋지 않던 성적이 점점 더 하향 곡선을 그린 것도 기억에 크게 남는다. 어린 마음에 성적이 좋아야 칭찬도 받고 공부는 잘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는 있었으니 걱정도 된다. 심지어 커닝도 하기 시작한다. 죽이 잘 맞는 친구가 있었다. 둘만 아는 비밀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놈이 그놈인지라 별반 뾰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적이 떨어져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당시 집안 분위기가 나의 성적에 관심을 가질 정도가 아니었나 보다. 그런 분위기도 성적 저하의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게 되었고 읍내에 유지로 계셨던 아버지는 수많은 추억과 애증의 그림자를 남기고 대처로 이사를 간다. 큰누나는 이미 읍내에서 대처까지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의사이신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살게 될 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건물을 짓고 한의원을 하셨고 그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살게 되시면서 새로운 외가를 이루셨다. 우린 모두 오래된 외가의 빈 집에 들어갔다. 그 집은 골목 안에 있었고 단층이었으며 양옥인지 한옥인지 헷갈리는 집이었다. 어두침침한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담이 있고 좌측으로 집이 있는데 ‘ㄱ’ 자로 된 집 본채에는 방이 세 개 있었다. 중앙에 마루 양 옆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 방 옆에 부엌 그리고 그 옆에 ‘ㄱ’ 자로 방이 하나 붙어 있었다. 마당은 아주 작았는데 바닥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다. 읍내에 살던 집의 마당에 비하면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코딱지만 한 크기였다. 마당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 수돗가까지 작게 있었다. 본 채 맞은편으로 작은 방이 하나 따로 있었고 그 방의 옥상은 장독대였는데 옆에 작은 계단이 벽에 붙어 있었다. 그 작은 방은 막내 외삼촌이 사용했다. 나는 안방에서 자기도 하고 외삼촌 방에서 자기도 하고 부엌 옆방에서도 자고 했다. 도무지 내 방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사 온 다음날 화창한 늦가을 아침, 아버지와 함께 처음 가보는 도시의 여러 길을 따라 전학할 학교의 교문을 들어선다. 등교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뛰어가는 도시의 애들도 보인다. 내 모습이 촌티가 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교무실에 들어섰다. 거기서 5학년 네 번째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인사만 하고 별반 말은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읍내의 학교에서 떼 온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를 담임선생님에게 건넸다. 아 속으로 찔끔했다. 성적이 엉망인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고개는 더 숙여졌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담임선생님은 아 학생 똑똑하게 생겼네. 공부도 잘하네 하면서 웃으신다. 성적표를 다 안 보셨나? 잘못 보셨나 싶었다. 아버지 앞이라 인사치레로 그랬겠지 싶다. 아버지는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나를 담임선생님에게 인계하고 가셨다.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갔다. 어떻게 소개했는지 기억이 없고 난 학생들로 빽빽한 교실의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옆 제일 앞자리에 배정받았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닌데. 당시는 키 큰 애가 뒤에 앉도록 키 순서대로 자리가 배정되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잘 어울리고 하는 것 같다. 전학 왔다고 신고식 하라는 것도 없고 왕따도 없고 같은 반 아이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는데, 시험을 친단다.    

  

   시험을 치면 쳤지 뭐 큰일이라고 칠판 귀퉁이에 큼지막하게 날자까지 적어놓고 매일 강조하는지 나는 진짜 잘 몰랐다. 평소 실력을 가늠하는 게 시험이지 뭐. 시험 친다고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데 뭘 준비하라는 건지. 그때 내 짝이 들고 보는 작지만 두꺼운 책이 보였다. 야 이기 뭐꼬? 이거 교과서도 아이잖아. 뭔데 교과서는 안 보고 이런 거만 보노? 이거? 이거 참고서 아이가. 문제도 들어 있고 시험 칠 때 다 이거 보고 공부하잖아. 시험공부? 그런 거 해야 되나? 그라마 니는 시험 친다 카는데 공부도 안 하고 시험 치나? 야 이거 어디 파노? 문방구에 다 판다. 난 다음날 바로 문방구에서 그 책을 샀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수업한 내용들이 모두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고 문제집도 같이 있었다. 심지어 모든 과목이 그 한 권에 다 들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시험공부를 했다. 별로 할 일도 없었다. 막 전학 온 처지라 친구도 없었고 친구들도 공부한다고 안 노는 애들도 많았다. 집에 가도 심심했고 외삼촌도 대학생이라 내 상대가 안 되고. 공부밖에 할 게 없었다.     

 

   시험을 잘 쳤다. 채점 안 해 봐도 안다. 작대기 몇 개 없으리라. 담임선생님은 제일 앞줄에 앉은 나에게 와서 이뻐 죽겠다는 듯이 양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대머리라 구분이 잘 안 되는 자기 이마를 내 이마에 갖다 댔다. 가슴이 부풀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을 몸으로 받은 나는 한껏 기분이 좋았다. 그랬다가 조금 뒤에 약간 실망했다. 1등은 다른 여자애가 차지해버렸다. 아니 실망보다는 약간 놀랬다. 역시 대도시는 다르구나. 그래도 내 머리가 천재는 아니라도 나쁘지는 않구나. 5학년 정도 이상의 공부는 수업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였구나, 시험 전에 공부를 안 했으니 성적이 안 좋았구나 하면서 나름 위안을 삼았다.  

    

   담임선생님은 중년의 나이셨고 땅딸보였다. 내 키보다 조금 크셨나? 모르겠다. 얼굴만 봐서는 잘 몰랐지만 우리 급우들을 다 사랑하셨던 것 같다. 비록 2개월 정도 담임이셨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름도 특이하셨다. 이두행. 한자를 잘 몰랐던 나이에, 뭔 두 가지를 행한다는 뜻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를 칭찬하는 두 가지를 행하신다는 걸까? 여하튼 선생님의 칭찬으로 나는 이후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 되시는 듯했다. 5학년 말의 집안 분위기는 좀 기억이 난다. 아버지도 집에 항상 계셨고 엄마의 표정도 나아지고 누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 잘 다니고. 엄마는 내 성적표를 받아 보시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더 넓은 대도시였지만 난 더 이상 멀리 놀러 다니지 않았고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계속 안 좋으셨다면,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난 어땠을까? 새 집은 좁은 집이었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겨울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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