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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옥현 Aug 11. 2021

우연과 필연

연탄가스 중독

   의식이 돌아온 건 병원 응급실에서였다. 의식이 돌아오는 장면이 영화에서처럼 소리가 서서히 크게 들리거나 점점 밝아지는 양상은 아니었다. 그냥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지막 기억들이 떠오르고 끊어진 기억들로 어리둥절해 있다가 엄마의 안도하는 표정으로 인해 짐작을 할 뿐이었다. 가족들의 설명으로 끊어진 기억들을 찾고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한 가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벌거숭이였다는 생각을 했다는 기억은 있다. 다시 살아났다. 의식의 저편까지 갔다 왔지만 거기는 그냥 암흑이었고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 죽다가 살아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죽었을 경우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특히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T시에 있는 우리 집은 2층 양옥이었지만 많이 낡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마당과 함께 집의 좌측에는 장독대, 수돗가가 있었고 우측으로는 높은 담과 집 사이에 좁고 침침한 공간이 있었고 내 키의 두 배 못 미치게 높은 곳에 욕실의 작은 창이 나 있었다. 골목 안에 있었지만 큰길 어귀에서 대문이 보이는 집이었다. 대문 위로는 호박이 열리고 있었고 옆으로 작게 화단도 있었다. 꽃을 좋아하시는 엄마는 철마다 꽃을 심으셨다. 가끔 호박 하나 따오라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시키곤 했다. 대문의 좌측으로는 작은 광이 있었다. 여기는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각종 목재들, 철물들이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고 주말 심심할 때면 이것들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문 위 호박을 따려면 사다리가 필요했고 광에 있는 목재들은 반나절에 걸쳐 제법 긴 사다리로 변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늦여름 개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직 늦더위가 한창이긴 했지만 저녁 무렵은 선선한 기운도 들기 시작했다. 그날은 식구들 중 할머니를 제외하고 모두 외출 중이었던 일요일 늦은 오후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계모임에 가셨고 이제 대학생이 된 큰누나는 친구들 만나러 나갔고 작은 누나와 여동생도 나가고 없었다. 대학생이었던 외삼촌이 양옥집의 2층에 같이 살고 있었다.

 

   2차 성징이 나타나면서 대중목욕탕 가기를 꺼렸고 집에서 간단히 샤워하는 정도로 때우기를 좋아했다. 더운물이 필요했으나 낡아가는 2층 양옥집의 기름보일러는 봄부터 고장이었다. 다가오는 겨울에 고칠 요량이었고 목욕탕에는 연탄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진작부터 보일러를 고치라고 연탄난로를 치우라고 엄마에게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난로에 양은 찜통을 얹고 물을 부어 더운물이 되기를 기다려 목욕탕에 들어갔다. 집에 할머니만 계셨지만 목욕탕 문을 꼭꼭 잠그고 씻기 시작했다. 한참을 비누칠하고 씻고 머리를 감고 때를 불려 씻어내고 있는데 뭔가 시원한 공기가 마시고 싶었는지 높이 달린 작은 창문 가까이 고개를 들이대고 숨을 들이쉬다가.......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떻게 대학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큰누나를 통해 들었다. 큰누나는 중학교 시절 말 그대로 친구 좋아하며 놀기를 좋아했다. 좋은 머리를 믿고 학교 공부는 등한시한 결과 당시 1부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는 H라는 읍내에 살 때인데 그 소식을 접한 그날 저녁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충격을 받은 누나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는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우리 집은 모두 T시로 이사했다. 2부 고등학교에 들어간 누나는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눈빛이 아예 달라졌다. 새벽같이 나가고 야간학습까지 마치고 돌아와선 씻고 바로 책상 앞에 앉는 생활을 몇 년 거친 끝에 번듯한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입학한 누나는 여유를 찾고 동생들에게도 따뜻한 누나로 돌아왔다.

      

   그날, 친구들과 즐거운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던 큰누나는 늦여름의 더위를 식혀줄 아이스크림, 하드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오래전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딸 둘을 낳고 단란하게 살던 할머니의 둘째 아들, 작은 아버지는 지난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가끔 먼 산을 바라보고 저 멀리 저 세상의 하늘을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눈가에는 촉촉함이 배어났고 그런 모습을 보던 나는 아직 어린 마음이었지만 할머니의 애통한 가슴속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충격으로 인한 건지는 모르지만 가끔 기억력이 희미해지는 일도 있었다. 할머니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느릿느릿 집안일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드를 들고 드시라고 다가오는 큰 누나를 보고 왔냐고 하고는 빨래 개는 일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다 나가고 없네? 현우는?” “현우? 글쎄 좀 전까지 집에 있었는데” “현우야! 아이스크림 먹어라”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아래서 큰누나가 큰 소리로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계단 아래 옆의 욕실 문은 닫혀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누나는 직감적으로 욕실 문을 잡았다. 대부분의 시간에 조금이라도 문이 열려 있던 욕실. 단단하다. 안에 누가 있으나 인기척이 없다. 문을 세게 두드리고 밀고 당겼지만 꼼짝을 안 한다. “할매! 현우 목욕하러 들어갔나? 문이 잠겨 있네?” “글쎄?” 그제야 상황을 느낀 할머니는 일시에 굳어진 표정으로 달려왔다.  문을 두드리고 온 몸으로 밀쳐도 문은 마치 이 너머는 절대 범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버티는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외삼촌은 3남 4녀 칠 남매 중의 여섯째이며 셋째 아들이었다. 의대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고 등산을 좋아하던 외삼촌은 2층에 살면서 나랑 야구놀이도 하고 앞산에 등산도 가고 시험 기간에는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약간 과묵한 스타일이었지만 가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했다. 일요일 오후 외삼촌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고 들어서자마자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온몸의 체중과 힘을 실어 욕실 문에 부딪혔지만 역부족이었다. 낡아가는 집이었지만 욕실 문만은 단단했다. 마치 오래전 무식하게도 튼튼함만을 고집하여 만든 비밀의 문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유심히 보지는 않았지만 사다리를 기억해냈고 문 이외에 유일한 바깥으로의 통로인 욕실 창으로 향했다. 좁은 공간에 사다리를 세웠다. 좀 짧았지만 어찌어찌 올라서면 창에 닿을 것으로 보였다. 아니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다. 무작정 올라갔다. 창은 열려 있었고 수증기가 자욱했다. 그 사이로 널브러져 있는 몸뚱이를 발견했다. 순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좁은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굳게 잠겨 있던 문은 쉽게 열렸고 축 늘어진 나체는 다부진 외삼촌의 양팔에 들려 뛰쳐나갔다. “택시 잡아!”라는 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이 당황했지만 큰누나는 큰길 가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응급실로 빨리 갑시다.” 택시는 쏜살같이 달렸고 나는 고압산소탱크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전화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흥겨운 계모임은 일순간에 표정이 일그러졌고 다들 걱정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고, 아이고, 클 났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엄마와 아버지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아버지는 계속 빨리 안 간다고 소리쳤다. 엄마는 이제 나는 다 살았다. 이 사람과 다시 같이 살아갈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귓가에는 보일러 고치고 난로 치우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맴돌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첫째와 둘째를 내리 딸만 낳은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 불안감에 점쟁이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점쟁이는 지금 뱃속에 든 애는 볼 거도 없이 딸이라고 했다. 엄마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엄마의 용기가 없었다면 하마터면 나는 세상 구경을 못할 뻔했다. 나는 집안의 대를 잇는 존재로 태어났다. 게다가 얼마 전 작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나는 졸지에 4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H읍내에서는 유지로 통했다. 할아버지가 일궈 놓으신 많은 재산을 배경으로 당시 대학원까지 수학을 하셨고 H읍에서 농협 조합장까지 지내셨다. 하지만 세월은 흐른다. 일생을 평탄하게 살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T시로 이사하기 전 몇 년간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하시던 사업들이 모두 힘들어졌다. 새로운 사업을 찾아 T시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당시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약탕기 제조사업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힘들게 노력한 끝에 집안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도 나가게 되었고 친구 분들과 즐거운 시간들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애들은 크고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옛날 친구들을 찾게 되고 모임도 자주 갖고 삶의 여유를 즐기는가 보다. 가끔은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부부 동반으로 놀러 다녀오시기도 했다. 계모임도 자주 가지셨다.   

   

   엄마도 그런 모임을 좋아하셨다. 그 누구보다 H읍에서 어려운 시절 마음고생이 심했을 엄마는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듯 계모임이나 나들이를 좋아하셨다. 엄마는 맏이였고 셋째 외삼촌보다는 무려 열일곱 살이 많았다. 맏이였던 엄마는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셨다. 바로 아래 큰외삼촌뿐 아니라 동생들은 모두 대학까지 다녔다. 내가 어릴 적 엄마가 라디오로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본 적이 있고 어느 날 방송통신고등학교 수료식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엄마는 끈기 있게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마 공부를 계속했다면 명문 대학에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사회는 가부장적인 색채가 진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어머니도 모시고 살았고 일 년에 여섯 번 제사를 지내야 하고 네 아이를 키우며 성격 급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남편과 사는 일이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가 밥상을 엎어버리는 것을 두세 번 목격한 적도 있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남으셨을 것이다.  

    

   엄마,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산소탱크 안에 있을 때였는지 나온 이후인지는 모른다. 내가 눈을 뜬 후에도 초조했던 표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날, 기억에도 잘 남아 있지 않는 시절에 두 부모님과 같이 잤던 일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퇴원하고 나서 동치미 국물을 한 그릇 마신 후에 안방에서 두 분과 같이 잠을 잤다. 다음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 아침 먹고 학교로 향했다. 쉬는 시간에 우연히 바라본 운동장에는 교무실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걱정돼서 오셨구나 싶었다. 난 멀쩡한데 싶기도 했고. 아마 담임에게 내가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고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가셨을 거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경험이 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 있는 걸 보면 후유증은 없었나 보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우연인가 운명인가 생각한다. 낡은 집의 고장 난 기름보일러, 치우지 않은 연탄난로, 내가 만든 사다리, 큰누나의 귀가와 아이스크림, 외삼촌이 나타난 시간과 체력, 택시 등등. 물론 모두에게 감사한다. 내가 살아나 엄마는 계속 우리 가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우연이 있고 그것들은 어떤 계기로 필연과 운명으로 생각되어진다. 아닐까? 운명이 우연처럼 다가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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