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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처입은 치유자 Jul 14. 2021

당신의 용기가 되려고
내가 먼저 실패해 보았습니다

실패의 재해석

내가 가진 것들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아내고 싶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 능력치에 대한 제대로 된 데이터와 평가도 없이 그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꿈을 꾸었던 나 자신이 철없이 너무 해맑아서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그 어렵다던 결혼도 이른 나이에 주저 없이 해버릴 수 있었겠지? 

배우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아니, 도움이 될 줄 알고.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 그것은 아주 겁 없는 생각, 객기에 가깝다는 것을 금방 알아버렸다. 

오히려 민폐나 끼치지 않으면서 살면 다행이라는 것을, 부끄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왜 이렇게 실수투성이고 야무지지 못하고 헐렁헐렁할까. 

이러면서 무슨 도움씩이나 주는 인생을 살려고 그 야무진 꿈을 꿨을까?' 하면서 점점 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차라리 싱글이었으면 혼자 망하고 말지, 괜히 결혼을 해서 여럿 망치겠구나 싶어 암담했다.

마치 이렇게 보란 듯 실패를 하려고 내 온 젊음과 꿈을 여기에다 쏟아부어 '여러분 이렇게 하면 절대 안 돼요!' 하고 미리 경고를 해주는 것이 혹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어려운 마음을 꺼내 놓고 싶었다. 

시도를 했지만 서로 살아가는 영역과 삶의 시간표가 달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공감을 받지 못했고,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나 자신은 더 초라해져 갔다.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도 속 시원히 터 놓을 수 없었다. 결혼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헸고 다른 사회와 공동체에 속해야 했던 것만으로도 이미 과부하였다. 

여기에 출산과 육아가 줄지어 따라왔고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허우적대며 겨우 숨만 쉬고 지냈다. 

남편에게 나는 씩씩하고 다부진 여자라는 환상이 있었는지 이렇게까지 어설프고 허술한 나의 맨 얼굴을 그도 어찌할 줄 몰라했다.


결혼을 괜히 일찍 했나? 그러나 그 누구도 원망할 수는 없었다. 모두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으므로. 

대신 나는 사람들에게 점점 말을 하지 않았고 내 마음을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직 모니터와 키보드만이 나의 눈을 바라봐 주고 차분히 나의 더딘 속도를 따라와 주었다. 

글을 쓸 때 만이 가장 정직한 내가 되고,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둘째가 5개월쯤 되었을 때, 아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저만치 앞에서 한 엄마가 파자마 차림으로 아기를 안고 불편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100일쯤 되어 보이는 아기였다. 

엄마는 나만큼이나 일찍 결혼을 했는지 어려 보였고 아기는 보채며 울고 있었다. 

정신이 없어 보이는 엄마는 아기를 안고 어르고 달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나는 언니 같은 마음으로 그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이상하게 똑같은 말이라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려버리고 싶고, 

친정엄마에게는 말 끝나기도 전에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싶은 법이며, 

언니들이 하는 말은 그렇게 잘 들린단 말이지.


 "아이고 우는 것도 예쁜 아기 천사네요. 너무 예쁜데 이렇게 울면 정말 힘들기도 하죠?"


라고 했는데 그 엄마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네... 너무 울어요. 이유를 모르겠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잠옷 입은 채로 이렇게 나와버렸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어요? 언니 아이는 몇 개월이에요? 그 정도 되면 좀 쉬워져요? " 


눈물이 그렁그렁한 엄마는 자기가 우는지 웃는지도 모른 채 질문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넋두리 같은 육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는 긴 이야기를 잘 들어주다가


  '어느 날 뉴스에서 한 러시아 엄마가 세탁기에 우는 애를 집어넣고 돌렸다는 내용이 나오던데, 

저는 이상하게 그게 엄청 이해가 되던데요'


라는 한 마디로 나의 좌충우돌 첫아이 육아기를 간단히 정리해주었다. 

그 엄마는 잠시 정지 화면이 되더니 자세를 고쳐 아이를 잘 안으며 아기의 애꿎은 엉덩이를 두드렸다. 

마치, 나도 그런 생각해본 적 있는데..라는 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처음 꺼내 보는 나의 섬뜩한 이야기였지만, 

무시무시한 내용에 반해 나와 상대방 사이에는 공감대라는 따뜻한 공간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 엄마는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 보였고 

아기는 언제 내가 울었냐는 듯이 방긋 웃고 있었다.

그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홀로 블랙홀에 빠져 곧 미쳐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나눌 '누군가'라는 것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도 딱 그랬다.


첫애가 태어났을 때.  

엄마가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아이도 엄마의 감정을 고스란히 먹고 불안해한다는 것을 몰랐을 그때.

육아는 개론대로 되고, 장비가 있으면 하는 줄 알았던 그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때.

누군가 나의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조금 나아질 텐데..

 

그리고 꼭 나 같은 사람이

 

'나도 그러했다고, 잘못하고 부족한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다고, 

힘드니까 그런 거라고 괜찮다'


라고 한 마다 들려주었다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어 나를 더 사랑해 줄 수 있을 텐데..

그 누군가가 간절히 그리웠던 때가 떠올라 잠시 애잔해졌다.


다행히 둘째는 순해서 한 손으로 키우고 있다는 생각에서 생긴 여유 때문에 그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애 키우는 게 다 힘든 거지, 옛날에는 10명도 키웠는데 겨우 이제 하나 낳아가지고, 세탁기에 애 집어넣은 엄마 이야기에 수긍이나 하고.. 

정신머리가 썩어빠진 나의 모습이라도 누군가와 나눌 때 서로에게 힘과 용기가 된다는 사실이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멋지고 좋은 모습, 성공한 이야기, 귀감이 되는 발자국들만이 내 뒤에 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실수는 더욱 참담한 패배로 여겨졌다. 

아울러 그동안 사람들의 육아 성공스토리만 기웃거리며 나와 비교했기에 내가 더 비참히 여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3~4년 후부터 친구와 지인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가끔 연락이 닿거나 만나면 나에게 사과를 하는 해프닝이 종종 생겼다. 

그때 싱글인 그들 눈에 일찍 결혼한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걸로 보였는데 힘들어하니까 말은 못 했다고. 그런데 막상 본인들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해보니 죽을 맛이더라고, 이 힘든걸 어떻게 지나왔냐고 겸연쩍은 말로 사과를 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과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딱히 뭘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나는 말할 곳도 없고 내게 말해 줄 이도 없어 외로움에 몸부림을 쳤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번뜩 떠오른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려고 일찌감치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든 일찍 성공하고 무엇이든 척척 잘하기만 했다면 친구들은 나를 시기 질투하지 않았을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지 않았을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과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어린 나는 나만큼 어린애들을 낳고 키웠다. 

키웠다기 보단 알아서 잘 자라주었다. 이제 큰 애가 벌써 고등학생이니까.

친구들 중에 결혼도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출산도 가장 빨리 했기 때문에, 당연히 육아 그리고 학령기 아이의 교육도 사춘기 아이들이라는 숙제도 내가 가장 먼저 만나는 관문이 될 것이다. 물론 갱년기까지도.


지금도 나는 여전히 혼란한 문제들을 안고 살고 있다. 

한 단계를 마치면 그다음 새로운 단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늘 처음으로 그 관문을 만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친구들보다 먼저 겪는 이 시기와 나의 경험들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고마운 생각을 꽉 붙들어 매야한다. 

그게 아니면 내가 쓸데없는 인간이라는 무너짐을 떨쳐버리지 못해 동굴 속으로 또 숨어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회복되어야 한다. 

읽어서 아는 지식 말고, 

몸으로 마음으로 겪은 나만의 앞선 경험이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라고 나를 위해 그렇게 믿고 오늘도 부스럭부스럭 마음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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