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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Sep 17. 2024

허망한 욕망으로 아름다운 현실(2)

동대입구. 국립극장. 맥베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3편으로 나눠 연재됩니다. 이전 글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2. 동굴에서도 욕망에 타오르는 인간

무채색의 무대에서 다채로운 욕망에 타오르는 맥베스는 무대에 비치는 그림자를 통해서도 돋보인다. 삭막하게 보이는 맥베스의 궁은 조명으로 한쪽이 밝게 비춰지는 순간 궁의 벽과 조명 사이에 서있는 인물에 의해 그림자가 진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궁 전체를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한다. 무대에 비치는 조명이 없었다면 <맥베스>의 무대는 빛 한 점 들어오는 일이 없는 동굴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조명을 통해서 벽에 비치는 그림자는 인물이 아닌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에게만 보인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에 들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맥베스의 그림자, 욕망에 잡아먹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맥베스의 그림자, 맥베스를 다잡으면서 지금의 순간을 너머 역사에 이름을 남기라는 레이디 맥베스의 그림자 등.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고 감추는 동안 사념처럼 벽에 아로새겨지는 그림자들을 관객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그림자가 새겨진 맥베스의 무대는 허상만 비춰진 동굴벽과 같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는 사실 혹은 진실 즉,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빛이 사라지면 모습을 감추는 욕망의 그림자처럼 허상만 좇는 허망한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떠올려보면 <맥베스>는 굉장히 단순명료한 극인 셈이다. 하지만 맥베스라는 인물의 비참한 최후는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벌처럼 보이기에 <맥베스>가 왜 비극인지, 이처럼 단순명료한 극이 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비극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잠시 동굴의 비유로 돌아가보자.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바깥에서 들어오는 태양에 의해 생긴 그림자에 홀린 죄수들의 이야기이다. 그 중 한 죄수만이 바깥에서 온 태양을 인지하고 그 태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홀로 동굴을 탈출한다. 그렇다면 관객 입장에서 단순명료해 보이는 <맥베스>의 모습은 허상이지 않을까? 관객이 봐야 하는 <맥베스>의 태양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미래를 속삭인 마녀들에 의해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욕망을 갖게 된 맥베스는 자신의 욕망이 옳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욕망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충성과 신의를 저버리는 살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위대하게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는 사실에 맥베스는 자신의 욕망이 세상에 보이지 않길 바란다. 자신의 욕망대로 던컨 왕을 살해하고 나서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자신의 죄의식을 바라보며 욕망대로 행한 것을 후회하고 종국에는 자신에게 헛된 욕망을 불어넣은 마녀들을 저주한다. 맥베스는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는 인물인 것이다.


레이디 맥베스 역시 비슷하다. 맥베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전해들은 그는 남편이 없는 동안 가문을 잘 가꾸고 남편이 옳은 길로 가도록 내조하는 당대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여성상과 달리 남편인 맥베스보다 더 가열차게 권력을 원한다. 남편의 죄의식을 하찮은 도덕적 위선이라 하면서 이른바 남자답게 미래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나아가라 말하는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은 남편보다 더 영웅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가문의 대를 위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미래에 자신들의 왕가를 빼앗을 뱅코우의 어린 자식들을 죽일 때. 귀족들을 결집해 맥베스에 저항하는 군대를 이끄는 맥더프의 자식들을 죽일 때. 권력을 향한 차오르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남편을 독려하던 영웅은 어린 아이들을 죽였다는 죄의식으로 낳지 못한 자식을 그리워하며 어두운 밤 복도를 유령처럼 걸어다닌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죄의식이라 하는 도덕적 불편감을 느끼는 것을 보며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인간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죄의식을 넘어 존재자로 던져진 세계를 자신의 욕망으로 부딪히는 모습에서 두 인물을 인간이라 느끼는 것이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는 마녀라 하는 어떤 비현실적인 존재를 빌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한다. 자신의 욕망이 자기 안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이를 스스로 현실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욕망을 이른바 운명에 대한 예언을 빌어 자신들의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무대 너머에서 관객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에 괴로워하면서도 세계와 부딪히며 욕망을 현실화하려는 두 인간의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에서 관객은 명징한 비극적인 진리를 깨닫게 된다. 던져진 세계에 맞서 존재하기에 자연스러운 욕망을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인간 존재의 비극을.


이와 같은 비극적인 진리를 <맥베스>는 조명으로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던 무대 위에 드리워지는 인물의 그림자를 보자. 그림자는 빛과 대상이 있기에 완성된다. <맥베스>에서 그림자는 단순히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 그들의 욕망은 반대편까지 뻗쳐져 세계를 가득 채운 것처럼 보인다. 조명을 통해 만들어진 그림자는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존재감을 무대 전체로 확장시키면서 욕망에 기댄 악 혹은 악행이 세계 어디에나 존재함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주체인 두 인물은 무대의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악행을 행하기 전에 꺼려하는 것을 넘어 두려워하고 행한 악에 대해 괴로워하는 두 인물은 무대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선의지 혹은 죄의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립극장의 <맥베스>는 단순명료한 연극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그림자를 통해 암시하는 연극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욕망을 드러내며 세계를 버틴다. 도덕적 측면에서 욕망을 판단하는 것 이전에 욕망은 살아있기에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인간에게 욕망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세계에서 아주 작은 위치만을 점하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상으로 뻗어 나아가는 욕망을 비현실적인 무언가에 빌어서라도 정당화하길 원한다. 물론 이러한 정당화에도 인간은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작은 위치에서 괴로워하며 끝내는 그러한 욕망에 휘둘려 세계에 부딪힌 자신을 비웃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죽음을 향해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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