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과 그림자라는 극 외적인 요소 외에 <맥베스>의 비극성을 극 내적으로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예언과 욕망의 모순된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맥베스>에서 예언은 겉으로 보기에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욕망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맥베스>에서 예언은 욕망의 촉매로서 예언만이 아니라 맥베스의 최후를 알리는, 말 그대로 정해진 미래를 선고하는 예언도 있다. 욕망의 촉매로서 예언도 실상은 정해진 미래를 선고하는 예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눈 여겨볼 것은 예언이 '정해진 미래를 선고'한다는 점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개척되는 것인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나타난다. 생존 욕구는 자연스러운 호흡만이 아니라 허기짐에 따른 식사를 비롯해 다양한 행동으로, 쾌락을 향한 욕구는 더 맛있는 음식, 더 짜릿한 스릴감,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음악 등 다채로운 문화적 양식으로 발현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이 순간 이후 1초, 1분, 1시간, 하루 등은 모두 인간의 욕망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만약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른바 인간 존재의 자유의지와 관련있다는 인간의 욕망은 사실 허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정해진 소프트웨어적 알고리즘과 하드웨어적 구조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 즉, 예언과 욕망은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맥베스>에서 예언과 욕망은 서로 반발하는 관계를 맺고 양립하여 극을 이끌어 나간다. 이러한 양립이 가능한 이유는 <맥베스>에서 예언이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극의 초반부에서 예언과 욕망은 마치 한 마차를 같은 방향으로 모는 쌍두마처럼 보인다. 글라미스의 영주에서 코도의 영주가 되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은 맥베스에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왕이라는 꿈을 꾸게 한다. 왕의 꿈을 꾸게 된 맥베스에서 시작해 인물들은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뜬다. 레이디 맥베스처럼 더 뜨거우면서 냉철한 권력욕을 갖게 된 이가 있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처럼 변화무쌍한 정치적 현실에서 자신도 기회를 잡으려는 기회주의자의 욕망을 갖는 이들도 있다. 맥더프처럼 국가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가족을 위한 복수심이라는 욕망에 불타는 이도 있으며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는 맬컴처럼 국왕으로서 자격이 없다며 스스로를 의심하는 욕망에 빠지는 이도 있다. 예언은 정해진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는 듯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 역시 그런 예언의 미래를 완성하기 위해 더 가열차게 자신을 불태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운명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예언은 욕망을 어떤 정해진 미래로 인도했을 뿐이다. 맥베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왕을 시해하는 반역자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배를 가르고 나온 맥더프에게 목이 잘린다. 이러한 맥베스의 최후가 정해진 미래라면 그의 죽음 이전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 가운데 맥더프의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것에 일조한 레이디 맥베스가 몽유병과 함께 미쳐버리고 결국 자살하게 된 미래 역시도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아직 오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 그러한 시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욕망으로 부딪히는 것 뿐인가? 하지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욕망 자체도 정해져 있는 것이기에 거기서 어떤 비극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부터 비극은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맥베스>에서 예언은 정해진 미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눈 여겨 볼 것이 하나 있다. 극이 끝날 때까지 맥베스의 미래는 온전히 완결되지만 뱅코우의 미래는 미완으로 남는 것이다. <맥베스>의 초반부에서 예언은 맥베스에 대한 예언만이 아니라 그의 전우이자 충신인 뱅코우에 대한 예언도 있었다. 글라미스의 영주에서 코도의 영주가 되어 왕이 될 것이라는 맥베스의 예언은 달성된다. 마치 예언에 따라 가열차게 불타오른 욕망에 의해 왕이라는 미래가 창조된 것 같다. 하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뱅코우에 대한 예언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뱅코우는 맥베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뱅코우의 아들만이 살아서 도망친다. 하지만 <맥베스>의 끝은 맥더프에게 목이 잘린 맥베스가 효수되고 맬컴이 새로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끝에 국립극장의 <맥베스>는 맬컴의 즉위식 이후 뱅코우의 어린 아들이 왕이 된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뱅코우에 대한 미완의 예언을 연출한다.
하나의 완성된 극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뱅코우에 대한 예언은 <맥베스>에서 완벽(完璧)에 남은 티와 같다. 하지만 동시에 뱅코우의 예언이 미완으로 끝나면서 <맥베스>는 비극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 극의 초반부에서 욕망과 함께 쌍두마 같던 예언은 극의 후반부에서 지독히도 기계적인 면모를 가져 정해진 미래로 인간을 몰아세우고 극을 넘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 허무주의적 요소 같다. 하지만 뱅코우에 대한 미완의 예언은 예언이 정해진 미래로 이끄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맥베스에 대한 예언은 이뤄진 것과 달리 뱅코우에 대한 예언은 달성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언은 허상인가 진실인가? 허상인지 진실인지 갈린다는 점에서 예언은 인간 존재 내부에서 허상처럼 있으나 발현되어 진실이 될 수도 있는 욕망과 비슷해 보인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와 같은 고정성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있다라는 가변성에 기대고 있는 인간 존재에 미리 알고 말한다는 예언이 가닿는 것이다.
<맥베스>에서 맥베스는 충심을 다하는 군인이었다가 갑작스럽게 치밀어오르는 욕망에 반역을 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아니다. 봉건군주제라는 사회에서 충신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가려졌을 뿐 그의 내부에서는 권력욕이라는 개인적인 욕망이 이미 존재했다. 그저 마녀의 예언이라는 외부 요인에 욕망이 촉발되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맥베스의 서사에서 관객은 비극성을 느낄 수 있다. 관객의 세계에도 만연해 있는 예언에 의해 촉발되었을 뿐 관객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가지고 있던 한 인간이 세계에 맞서다 스러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패배라는 결론 외에 다른 결론이 없음에도 욕망의 가면을 쓴 채 세계와 맞서는 인간. 예언과 욕망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맥베스>는 한계조차도 이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을 아름답게 그리는 비극이기에 여전히 오늘날에도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립극장 <맥베스>의 마지막 장면인 뱅코우의 어린 아들이 왕으로 즉위한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두근거린다. 맥베스라는 인간과 사건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의심하던 맬컴은 결국 선군이 되지 못한 것인지, 그리하여 다른 누군가가 뱅코우에 대한 예언을 떠올리고 그를 찾은 것인지, 아버지를 잃은 뱅코우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바랐는지, 복수의 대상이 사라진 가운데 뱅코우의 어린 아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다른 누군가 어떤 욕망의 흐름 속에서 뱅코우의 아들이 왕이 되길 바란 것인지. 욕망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알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내세우며 세계와 맞서는 비극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언과 같지 않은가. 이 예언은 정해진 미래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예언을 본 관객의 욕망과 반발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인가? <맥베스>는 관객에게 묻는다. 극장을 떠나는 우리 각자는 어떤 욕망으로 세계 맞서다 스러질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