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현실의 단면을 보며 느끼는 도덕과 인지의 부조화(3.5)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듯한 감각 속에서 도덕과 인지의 부조화를 느낀 영화이다. 영화의 '재완(설경구 분)'과 '재규(장동건 분)' 형제의 가족은 흔히 말하는 중산층 가족이나 중산층 가족이 아니기도 하다. 극단적 양극화가 진행 중인 한국 사회에서 재완과 재규 형제의 가정은 전통적인 학제적 의미에서 중산층일 수 있으나 현실적인 층위에서는 평범한 중산층이라고 인식되지 않는다. 재완의 딸인 '혜윤(홍예지 분)'과 재규의 아들 '시호(김정철 분)'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청소년 이미지의 집합이다. 하지만 이 둘이 정말 오늘날 청소년의 평균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아니 정확하게는 들어 본 적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영화 속 가족과 그들 개개인이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서 본 적 있다는 감각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영화와 현실 사이 경계를 흔들어 인식의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출처. 키노라이츠
<보통의 가족>은 "자식의 죄를 부모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적 의문을 통해 일종의 사회적 공감대를 제시하는 영화로 느껴진다. 이 때의 사회적 공감대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삶에서 비슷한 직접 경험을 하며 형성된 것이 아니라 비슷한 간접 경험의 총체에 가깝다. 강력 범죄, 청소년, 도덕적 해이,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 등 익숙하다는 말보다 완전히 체화되어 정신적으로도 내재된, 실상이라고 여겨지는 한국 사회의 단면 혹은 그 단면의 온상에 대한 간접 경험의 총체이다. 정치, 경제, 사회를 공유하는 국가라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성별, 세대,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 등 다양한 공동체의 난립으로 공동체의 경계 자체가 흐릿한 현실에서 간접 경험의 총체가 남긴 것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공동체의 위기이다. 실제 자신이 그 공동체의 소속이라는 소속감, 즉 누구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 공동체를 이룬 누군가와 물질적·정신적으로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와 같은 인식이 명확하지 않은 실날 같은 공동체감으로 한국 사회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상황에서타인은 온갖 사회적 문제의 시발점이자 가능성으로서 인식될 뿐이다.
출처. 키노라이츠
<보통의 가족>은 다른 의미에서 공포스러운 영화이다. 노숙자를 폭행해 살해했으면서도 일말의 죄책감 없이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혜윤과 시호, 자식의 앞날을 위해 범죄 사실을 눈감아주려는 재완과 재규 등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편을 덕지덕지 기운 유령들이다. 사회적 문제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여기저기서 잡아뜯어 기운 유령. 한국 사회 문제의 온상에 대한 간접 경험을 이제는 완전히 체화해 완전히 분리하여 인식할 수 없기에 이 유령들이 주는 공포는 불편하다는 것을 넘어 실제로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착각과 함께 공포스럽다. 단편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혹은 경험했더라도 거의 드물었을 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유령들은 그러한 인식 위로 자신들의 모습을 언뜻거리며 보인다. 사회적 문제의 가능성으로 타인을 재현하지 않는 간접 경험을 거의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한국 로맨스 영화에서 첫 손에 꼽는 허진호 감독이라는 점이 왜인지 모르게 더 공포스럽다. 이전의 영화들과 다르게 조금의 로맨스, 이른바 낭만적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단편의 유령이 펼치는 공포스러운 도덕극은 마치 허진호 감독조차도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낭만적 감정을 그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허진호 감독은 본인을 로맨스 영화 감독으로 말하거나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허진호 감독이 스크린으로 보여준 한국 사회의 낭만성, 그러니까 타인으로부터 따뜻해서 설레고 두근거리는 감정을 기대하는 낭만성에 미소를 지었던 관객이라면 <보통의 가족>은 더욱 공포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인식과 그렇다는 인식 사이에서 도덕적 분노를 느끼는 자신에게서 스스로도 현실의 낭만성을 잊은 사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