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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Nov 18. 2024

투박하게 전하는 진심은 가닿을까?(2)

혜화. 대학로 예술극장.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초대해주신 극단 고래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본 글은 2편으로 나눠 연재됩니다. 이전 글을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3. 『비명자들』의 진심과 장르의 괴리

『비명자들 3막』이 좀비 장르, 즉 일종의 종말을 다루고 있은 아포칼립스 장르라는 점 역시도 『비명자들』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비명자들 3막』은 북한 비명자가 사망하면서 남한의 군인들이 사상하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극단으로 치달은 남북한 관계 속에서 비명자들이 자발적으로 DMZ로 넘어가 나무로 변해 숲을 이루면서 끝이 난다. 이러한 결말에서 의문인 것은 결말로 흘러가는 『비명자들 3막』의 서사가 지나치게 극단으로 몰고 가다 편의주의적으로 끝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비명자들 3막』의 결말부는 비명자들을 살리기 위한 선재와 비명자들을 학살하려는 정부 사이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은 상황이다. 남북한의 전쟁이 재개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UN을 비롯한 한국 정부는 비명자를 학살해 갈등 요소 자체를 제거하려 하고 선재는 그런 권력자들의 태도에 분노해 비명자들을 일반 시민들 사이로 섞이게 해 비명자들을 살리면서 서로가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명자들이 자신들과 정부 사이 충돌을 피하고 자신들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시민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DMZ로 가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결말부의 주요 상황이다.


『비명자들 3막』의 종말은 DMZ의 공간성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현대사에서 DMZ가 가지는 공간성은 모순적이다. 우선 DMZ는 극단적인 인위성을 통해 형성된 혐오의 공간이다. 단순히 6.25 전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형성된 공간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리 소문도 없이 시작된 냉전 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부터 DMZ라는 공간의 태동은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달성한 일제로부터 해방 및 광복은 그 자체로 한반도 내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혐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기반 혐오가 정치적으로 격화되어 시작된 6.25는 여러 담론과 연구에서 알 수 있듯 마찬가지로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인위적 산물인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다. 전쟁 자체만으로도 인위적인 행위인데 그 행위 자체를 대리한 결과가 6.25인 것이다. 나아가 DMZ의 형성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까지 겹쳐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제 막 공산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중국과 6.25로 다시 소생한 자본주의 국가 일본 사이에서 두 이데올로기 진영의 대립을 위한 공백 지대가 필요했고 한반도의 DMZ는 지정학적 위치에 입각한 산물인 것이다. 즉, DMZ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 대립라는 정치적 혐오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인위적 공간이다.


동시에 DMZ는 통시적 시각에서 봤을 때 가장 극단적으로 자연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휴전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가장 극단적인 인위성으로 형성된 DMZ는 오히려 인위적인 행위가 극단적으로 제한된 공간이 된다. 한반도 서식 동·식물의 30%에 해당하는 약 3천여 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숲은 원시림에 버금갈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DMZ의 생태계이다. 물론 국경지대라는 점에서 DMZ에는 세계 최고위 수준으로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오태석의 『내사랑 DMZ』에서 알 수 있듯 동물들이 오고 가다 매설된 지뢰를 밟아 폭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럼에도 동서로 약 250km, 남북으로 각각 2km씩 총 4km 폭으로 된 이 공간은 인위적인 행위가 극히 드문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에 따라 시화호와 새만금의 개발로 터전을 잃은 동물들이 DMZ로 이주했다는 『내사랑 DMZ』의 표현처럼 지뢰, 서로를 겨누는 남북한의 총구와 같은 위험한 인위성을 품고 있음에도 DMZ는 한반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순수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다. 이와 같은 자연성에 대해 『비명자들 3막』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실제로 어디든 가서 인위성을 발현하는 MZ 세대들 조차 갈 수 없는 장소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비명자들 3막』에서 DMZ는 인위성과 자연성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정치적 중간지점으로 두 국가 간 일촉즉발의 상황이 항상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르게 말하면 DMZ는 한반도의 중간에 있으나 동시에 막장인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 북한과 아무런 정치적 합의없이 비명자 수용소를 설립한 남한 정부의 모습이나 그러한 남한 정부에게 책임을 돌리며 자신들도 동일하게 비명자 수용소를 만든 북한 정부의 모습은 막장에 막장을 더한, 지독한 혐오와 고통의 문제 한가운데에 있는 모습이다. 『비명자들 3막』의 세계관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과 중동의 가자지구 분쟁의 격화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극 중 남북한의 막장 상황은 정말로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더한다. 이처럼 아포칼립스 장르는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제시해 인물들을 억압해 관객을 억압한다. 당연한 순리로 관객은 이 억압을 해결하는 극적인 상황을 기대한다. 극적 상황은 콘텐츠를 지나치게 신파적이거나 대중적이게 만들 수 있으나 동시에 종말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인간적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특히나 중요하다. 『비명자들 3막』의 경우 종말을 이겨내는 인간적 태도를 불교 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 『비명자들 3막』은 극단으로 치닫은 상황에 따른 관객의 억압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듯하다.


극 중 비명자들은 공포스러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극 중 다른 존재들에게 주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지를 상실한 비명자들은 정부의 과장, 연구소의 수진이나 선재, 민홍과 파사 대원들의 행동에 따라 반응할 뿐 먼저 자신들이 행동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관객 대다수에게 비명자들은 억압받는 존재들이지만 일종의 오브제로 느껴질 뿐이고 비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선재를 중심으로 한 파사현정 연구소의 인물들이 극 중 억압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들로 인식된다. 하지만 억압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히려 선재를 통해 들려오는 비명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표인 보현에게서 나타난다. 비명자들은 먼저 혐오와 고통을 당한 자신들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며 혐오하는 일반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비명자들의 태도는 DMZ로 들어간다는 선택을 일견 수긍할 수 있게 하나 동시에 언제나 혐오와 고통을 당하기만 한 피해자인 그들이 가해자인 정부와 시민을 위해 먼저 삶을 포기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비명자들을 극 중 어떤 주체적인 존재로 그러니까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 혹은 인물군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명자들이 정부와 시민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도록 하는 외부적 요인은 관객이 보기에 시각적으로 부족하게 연출된 것 같다. 즉, 피해자이기에 관객을 감정적으로 동요시킬 수 있으나 어떤 태도로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던 비명자들이 먼저 용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마냥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러한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듯 선재는 끊임없이 비명자들에게 시민들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고 부르짖으며 마지막까지 비명자들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극단 고래 제공

『비명자들 3막』의 종말은 DMZ의 공간성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현대사에서 DMZ가 가지는 공간성은 모순적이다. 우선 DMZ는 극단적인 인위성을 통해 형성된 혐오의 공간이다. 단순히 6.25 전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형성된 공간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리 소문도 없이 시작된 냉전 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부터 DMZ라는 공간의 태동은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달성한 일제로부터 해방 및 광복은 그 자체로 한반도 내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혐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기반 혐오가 정치적으로 격화되어 시작된 6.25는 여러 담론과 연구에서 알 수 있듯 마찬가지로 각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인위적 산물인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다. 전쟁 자체만으로도 인위적인 행위인데 그 행위 자체를 대리한 결과가 6.25인 것이다. 나아가 DMZ의 형성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까지 겹쳐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제 막 공산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중국과 6.25로 다시 소생한 자본주의 국가 일본 사이에서 두 이데올로기 진영의 대립을 위한 공백 지대가 필요했고 한반도의 DMZ는 지정학적 위치에 입각한 산물인 것이다. 즉, DMZ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 대립라는 정치적 혐오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인위적 공간이다.


동시에 DMZ는 통시적 시각에서 봤을 때 가장 극단적으로 자연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휴전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가장 극단적인 인위성으로 형성된 DMZ는 오히려 인위적인 행위가 극단적으로 제한된 공간이 된다. 한반도 서식 동·식물의 30%에 해당하는 약 3천여 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숲은 원시림에 버금갈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DMZ의 생태계이다. 물론 국경지대라는 점에서 DMZ에는 세계 최고위 수준으로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오태석의 『내사랑 DMZ』에서 알 수 있듯 동물들이 오고 가다 매설된 지뢰를 밟아 폭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럼에도 동서로 약 250km, 남북으로 각각 2km씩 총 4km 폭으로 된 이 공간은 인위적인 행위가 극히 드문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에 따라 시화호와 새만금의 개발로 터전을 잃은 동물들이 DMZ로 이주했다는 『내사랑 DMZ』의 표현처럼 지뢰, 서로를 겨누는 남북한의 총구와 같은 위험한 인위성을 품고 있음에도 DMZ는 한반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순수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다. 이와 같은 자연성에 대해 『비명자들 3막』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실제로 어디든 가서 인위성을 발현하는 MZ 세대들 조차 갈 수 없는 장소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비명자들 3막』에서 DMZ는 인위성과 자연성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정치적 중간지점으로 두 국가 간 일촉즉발의 상황이 항상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르게 말하면 DMZ는 한반도의 중간에 있으나 동시에 막장인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 북한과 아무런 정치적 합의없이 비명자 수용소를 설립한 남한 정부의 모습이나 그러한 남한 정부에게 책임을 돌리며 자신들도 동일하게 비명자 수용소를 만든 북한 정부의 모습은 막장에 막장을 더한, 지독한 혐오와 고통의 문제 한가운데에 있는 모습이다. 『비명자들 3막』의 세계관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과 중동의 가자지구 분쟁의 격화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극 중 남북한의 막장 상황은 정말로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더한다. 이처럼 아포칼립스 장르는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제시해 인물들을 억압해 관객을 억압한다. 당연한 순리로 관객은 이 억압을 해결하는 극적인 상황을 기대한다. 극적 상황은 콘텐츠를 지나치게 신파적이거나 대중적이게 만들 수 있으나 동시에 종말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인간적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특히나 중요하다. 『비명자들 3막』의 경우 종말을 이겨내는 인간적 태도를 불교 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 『비명자들 3막』은 극단으로 치닫은 상황에 따른 관객의 억압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듯하다.


극 중 비명자들은 공포스러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극 중 다른 존재들에게 주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지를 상실한 비명자들은 정부의 과장, 연구소의 수진이나 선재, 민홍과 파사 대원들의 행동에 따라 반응할 뿐 먼저 자신들이 행동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관객 대다수에게 비명자들은 억압받는 존재들이지만 일종의 오브제로 느껴질 뿐이고 비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선재를 중심으로 한 파사현정 연구소의 인물들이 극 중 억압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들로 인식된다. 하지만 억압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히려 선재를 통해 들려오는 비명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표인 보현에게서 나타난다. 비명자들은 먼저 혐오와 고통을 당한 자신들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며 혐오하는 일반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비명자들의 태도는 DMZ로 들어간다는 선택을 일견 수긍할 수 있게 하나 동시에 언제나 혐오와 고통을 당하기만 한 피해자인 그들이 가해자인 정부와 시민을 위해 먼저 삶을 포기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비명자들을 극 중 어떤 주체적인 존재로 그러니까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 혹은 인물군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명자들이 정부와 시민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도록 하는 외부적 요인은 관객이 보기에 시각적으로 부족하게 연출된 것 같다. 즉, 피해자이기에 관객을 감정적으로 동요시킬 수 있으나 어떤 태도로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던 비명자들이 먼저 용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마냥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러한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듯 선재는 끊임없이 비명자들에게 시민들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고 부르짖으며 마지막까지 비명자들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극단 고래 제공

혐오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모두가 조금이라도 혐오와 고통에서 벗어나 편해지길 바란다는 선재의 마지막 말도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DMZ에서 나무로 변해가는 비명자들을 보던 선재는 끝내 혐오와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을 보며 앞서 말한 바람의 대사를 남긴다. 선재의 대사 전 『비명자들 3막』은 DMZ를 한국의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위한 위령제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6.25 전쟁에서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총살 당한 이, 전쟁 중 살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죽은 이 등 비명자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에서 혐오와 고통의 굴레에 억압당한 이들의 영혼이 모여 각자의 한풀이를 하는 것이다. 인위성과 자연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DMZ에서의 위령제 연출은 DMZ의 자연성 이미지를 극대화한 생태주의 아동극 『내사랑 DMZ』에서 부생군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동물들이 노래를 부르며 한바탕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비명자들의 처리를 놓고 대립하는 시민들, 비명자에 의한 일반인의 피해를 막기 위해 파사를 결정한 유엔의 권고, 비명자를 파사하기 위해 선재를 비명자들과 떨어뜨리려는 정부 등. 극 중 결말부의 극단적인 상황은 비명자들을 통해 진행되는 위령제로, 위령제에 대한 선재의 바람으로 감정적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재를 중심으로 혐오와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던 것이 오브제처럼 여겨졌던 비명자들로 넘어간 상황에서 선재의 바람은 애매하게 느껴진다. 극단적인 상황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포기한 채 그저 올바르기만한 희구의 말을 던지며 끝맺음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내사랑 DMZ』의 동물들은 경원선 건설에 대해 저항하다 부생군의 도움을 받았으며 부생군이 동물들의 소망 보다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원했을 때 오히려 희생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즉, 애초부터 동물들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 갔으며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부생군은 자연성을 대표하는 동물들을 강조하는 인물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극 중 경원선 철도 건설을 막지 못하고 부생군을 위해 희생하며 삶의 터전을 잃게 될 동물들이 춤과 노래의 축제로 극을 마무리해도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생명의 순환을 바라는 동물들의 바람은 이전 동물들의 주체적 행동과 선택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명자들 3막』은 선재를 중심으로 이끌어가던 중 이전까지는 해결 대상인 비명자들로 중심을 옮겨 비명자들의 위령제로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봉합하려 한다. 선재는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 채 혹은 해결을 위한 실마리도 남기지 못한 채 올바르기만한 희구의 말을 던질 뿐이다.


『비명자들 3막』이 지금 이순간에 가지고 있는 의의는 명확하다. 『비명자들 3막』은 현 시대의 혐오와 그에 따른 학살을 다루는 공시적 관점에 더해 과거의 혐오와 그에 따른 학살까지 아우르는 통시적 관점으로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고찰한다. 나아가 사성제와 삼법인이라는 불교 이론을 접목해 혐오와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현대인들의 관점이나 태도를 사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명자들 3막』은 극단 고래다운 연극이자 충분한 의의가 있다. 다만 그러한 의의, 그러니까 극단 고래가 혐오와 고통의 문제에 전하고자 하는 진심이 관객에게 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성제와 삼법인에 입각한 관점과 태도는 너무 투박해 어떤 형태로 드러날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워 관객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못한다. DMZ라는 모순된 공간에서 비명자들의 위령제와 모든 이들이 혐오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평안하길 바라는 선재의 바람은 전하고자 하는 위로와 진심을 전달하기에는 힘없이 흩어지는 것 같다. 극단 고래의 투박하지만 진심어린 태도를 알고 있기에 『비명자들 3막』의 마무리는 8년 여정의 끝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더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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