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윤리가 아닌 권리로서 죽음을 대할 때(4.0)
윤리가 아닌 권리로서 죽음을 대할 때 인간이 얼마나 윤리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설적인 영화이다. 영화에는 두 개의 종말이 대치하고 있다.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세계와 죽음을 앞에 둔 개인이다. 다르게 말하면 <룸 넥스트 도어>에서 개인-세계 즉, 세계 자체는 총체적으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룸 넥스트 도어>는 공포스럽다. 분명 총체적으로 세계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임에도 겉으로 보여지는 영화의 세계는 너무나 평화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한 채 살아간다. 서서히 끓는 물에서 수영을 하며 목욕을 즐기는 개구리가 결국 죽듯 인간은 멀리서 발생 중인 비극도 평화의 일부라 여길 따름이다. 종말의 과정을 인지하고 있는 '데미언(존 터투로 분)'과 같은 이들도 있으나 종말를 피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역설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포자기한다. 종말을 직면하고 있는 세계와 종말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 사이의 부조화를 <룸 넥스트 도어>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 부조화를 인지했을 때 인간이 죽음이라는 운명 혹은 사실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지 혹은 죽음에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죽음은 멀게만 느껴지는 종말이다. 하지만 가는 데 순서 없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그러나 종말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평화롭게만 보이는 세계는 죽음이라는 개인의 종말을 잊게 만든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오늘을 가치 있게 살라는 말에는 죽음을 인지하고 이해한다는 전제가 있으나 죽음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 대다수에게 오늘의 가치는 순간의 쾌락에만 맞춰져 있을 뿐이다. 각자의 쾌락에만 집중하고 있는 인간은 죽음에 무감각하기에 실제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이를 자신의 운명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각자의 쾌락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환경이 윤리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기에 죽음을 앞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어떻게든 살게 하는 인간적 관습으로서 생명 윤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생명 윤리로 죽어가는 인간을 대할 때 죽음의 고통은 오롯이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다른 이들은 계속해서 종말을 잊고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기에 <룸 넥스트 도어>에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 분)'의 선택과 '마사(틸다 스윈튼 분)'의 선택은 권리로서 죽음을 인지하게 한다. 관객에게 미혼모이자 종군기자인 마사가 암 투병 대신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은 죽음까지 이어져 있는 삶의 모습을 깨닫게 한다.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전하는 삶의 이야기는 크게 3가지 경험으로 압축된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연인을 위로하다 임신하게 되어 갑작스럽게 생명을 맞이한 경험, 각자의 이유로 헤어지게 된 연인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환청 속에서 불이 난 집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험, 종군기자로서 죽음이 만연한 현장에서 서로를 사랑했던 두 남자를 본 경험. 마사의 삶은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삶과 죽음이 공존했으며 마사는 죽음을 항상 인지하며 자기 삶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었다. 관객의 입장에서 마사의 삶은 쾌락으로 지속되는 삶이 아니라 끝날 수도 있다는 인식으로 가치를 찾는 삶을 깨닫게 한다.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이는 다양한 가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삶을 산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해서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한다. 그에게 삶이란 산다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암을 치료하며 삶의 희망을 부여잡기 보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마사 곁에서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겠다는 잉그리드의 선택은 권리로서 죽음이 지닌 또 다른 모습이다. 죽음이라는 종말을 권리로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책임 혹은 의무이다. 오래 전 친구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교류가 거의 없던 두 사람에게 서로는 모르는 타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마사의 부탁에 따라 그의 죽음을 곁에서 봐주며 함께 하겠다는 잉그리드의 선택은 평화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해하기 어렵다.자신의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전화해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마사가 잉그리드의 집에서 대화를 마치고 나가는 장면이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사라진 어떤 이성적 인과를 관객은 그저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완벽한 인과성을 상상할 수 없다.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상상은 암 투병 중인 마사와 만나 마사가 두런두런 전하는 미혼모이자 종군기자로서 인생사를 잉그리드가 들으며 무언가를 깨달았나 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그저 스크린 너머 관객의 상상일 뿐이다.
잉그리드의 선택에 대한 모든 상상을 잠시 제쳐두고 나면 죽음이라는 종말을 권리로 받아들일 때 타인의 죽음은 단순히 타인이 죽었다는 사실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에서 어떤 한 존재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지닌 무게감을 감내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종말감, 언제고 마사와 같은 죽음이 다가섰을 때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롯해 죽음과 관련된 모든 고통과 감정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에 잉그리드의 선택은 마사의 선택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죽음을 매개체로 잉그리드와 마사는 가장 윤리적인 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윤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이나 다를 바 없는, 삶에서 더 이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존재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과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 사람 사이 있는 소통이다. 서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은 어떤 이성적인 논리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집에 가는 택시에서 불현듯 전화를 걸어 함께 하겠다는 말처럼 불가해한 논리로 가능하다. 그저 그것이 당연하기에 하는, 너무나 자연적인 윤리적 선택. <룸 넥스트 도어>의 있는 그대로의 색감처럼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자연적인 윤리적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한 인간의 모습은 고요하지만 죽은 이에 대한 기억으로 넘실대는 감정이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