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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여우랄라 May 04. 2023

그 아인, 왜 집을 나갔을까?

(여성시대 원고, 뽑히진 않았지만...)


  27 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겨우 20살이 되던 해에 나는 어느 작은 회사 총무부 여사원이 되었다. 그 때는 ‘고졸 여사원’이란 그저 ‘여자 사람 직원’이 아니라 ‘잡무를 돕는 여자 직원’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회사 내에 차별적 표현이 금지되고 평등한 관계와 대우를 목표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때의 고졸 여사원의 처우란 것은 사무실 심부름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문제였다. 내가 주로 하던 일은 직원들이 사용할 문구 구입, 대리님과 과장님이 제출할 서류의 문서작성, 탕비실 음료 준비, 사무실 손님 접대, 그리고 전화응대였다. 호칭 역시도 OO양이었다. 이 모든 문화가 바뀐 것이 사실은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웃을 일이지만, 나와 같은 40, 50대에겐 힘든 시간이었고 떠올리면 아련하게 아파오는 과거다. 그 때는 많은 회사들이 그러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앞 둔 시점에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마냥 거부반응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고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만은 견뎌 내리라 다짐하며 취업을 했다. 


  그러나 ‘나만은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오만이었을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 중 유독 견딜 수 없는 것은 점심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직원들은 다 함께 일어나 나간다. 다같이 우르르 나가며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의논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그와 반대로, 나는 조용히 그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리곤 우두커니 앉아 혹시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전화를 기다렸다. 나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자기가 맡은 일이 있기에 그 일을 하고 제때에 점심을 먹고 다시 제 시간에 일을 하면 되었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필요 시에 위에서 시키는 일을 기다렸다 해야 했고 점심시간엔 혹시나 올지 모르는 거래처 전화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원들이 들어와 커피까지 한잔씩 마시고 나서야 부장님은 내게 다녀오란 신호를 보냈다. 그때서야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갈 때면 무척이나 처량했고 외로웠다. 마치 버려진 아이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건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었다. 내가 자라온 집에서 밥 시간이란 밥만 먹는 시간이 아니라 내 하루를 나누는 시간이었고 가족들의 하루를 듣는 시간이며 쉼의 시간이었는데 우두커니 홀로 밥만 먹고 돌아오는 그 시간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땐 식당에서도 4인 석에 홀로 앉아 있으면 의례 것 합석을 요구하던 시절이었고 낯모르는 사람들과 합석해서 밥을 먹을 때면 ‘정말 이 놈의 회사 그만둬야지’를 백번은 되뇌며 밥을 먹었더랬다.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의 변화가 참 감사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처음 보는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리님은 고3 실습생이라며 내게 인사 시켰고, 부장님은 내 일이 너무 많아 도울 사람을 뽑았다며 생색 아닌 생색을 냈다. 나는 내심 ‘그럴리가 있을까?’의심도 했지만 어쨌든 내게 동지가 생겼다는 것이 좋아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친구는 붙임성이 좋은 건지 금세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고 언제나 밝게 웃으며 내게 말을 붙여주었다. 우린 곧 친해졌고 일하는 틈틈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무엇보다 이제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가도 홀로 버려진 느낌으로 전화기만 바라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시간을 만들어 가면 되니까. 그래서 나는 언제고 그 아이가 나와 함께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그 친구는 조용하고 고지식한 나완 달리 참 천진하고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달리 말하면 천방지축이었다. 상업계 고등학교라면 배웠을법한 문서작성도, 회계처리도 할 줄 몰랐고, 윗분들의 심부름에도 실수가 잦았다. 나는 대리님과 과장님께 여러 차례 불려갔고 ‘네가 가르치는 거다. 똑바로 해라.’ 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했다. 어쩌면 나는 그 친구가 오기 전보다 일이 조금은 더 늘은 것도 같았다. 사실, 새로 시작하는 일 보다 이미 엉망이 된 일을 바로 잡는 일이 더 수고로운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동생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직장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나보다. 더구나 동생은 나를 무척이나 의지했고 ‘같이 놀자’, ‘같이 어디 가자’ 자꾸만 나를 끌어당겼다. 그런 동생은 나와 참 달랐다. 이미 남자친구도 있었고 여러 방면으로 잘 놀았는데, 가끔은 내가 어줍잖은 조언을 늘어놓기도 했다. 아직 나조차도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찾고 또 찾을 나이였지만, 왠지 동생에게 난 그 시간을 지나온 지혜로운 사람인양 좋은 길로 이끌어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마도 동생을 좋아하는 마음에 친언니같이, 혹은 이모같이 그 아이가 좋은 삶을 살아가길, 보다 나은 선택을 하길 바랐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해 보니, 동생이 오지 않았다. 과장님과 부장님은 내게 빨리 연락해 보라 했다. 그런데 마침 내 자리로 전화가 걸려왔고 동생의 어머니였다. 마치 학교 선생님께 아이의 상태를 고하려는 듯 어머니는 무작정 나를 찾으셨고 내게 동생이 집을 나간 것 같다 하셨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더러 함께 찾아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언니 이야기를 평소에 많이 했었고 무척 의지하고 있었다며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 아이는 왜 가출을 했을까?’ ‘어디로 갔을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척 겁이 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난감했다. 그래봐야 동생을 만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된 상황이었고 동생과 그녀의 남자친구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생을 찾고 싶었다. 문제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함께 일 하고 싶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동생과 함께 갔던 커피숍과 동생의 남자친구를 소개받았던 밥집에 가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삐삐를 치고 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삼일 째 되던 날, 동생은 아무 일도 없었던 보통의 날처럼 활짝 웃으며 ‘언니~’하고 나타났다. 그렇게 애를 태워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타난 모습에, 그간 애태우게 만든 게 얄미워 등짝을 치며 ‘도대체 어디 갔었어?‘ 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인 그저 웃으며 ’놀았어요.‘ 했는데, 나는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땐 나조차 너무 어렸고 놀았다는 말에 다른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단 생각을 깊이 있게 하진 못 했다. 연신 그냥 놀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냥 놀았을 것 같았다. 놀기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던 동생이었기에 어쩜 진짜 놀았을 수도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동생이 이렇게 다시 온 게 안심이 되고 기뻤다. 다만, 이를 윗선에서 이해해주고 받아줄 것인지가 조마조마했고 나는 과장님, 부장님 눈치를 보느라 안절 부절인데 동생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과장님, 부장님~ 저 왔어요.‘ 했고 ’죄송합니다.‘ 했다. 그 모습이 황당해서일까? 아니면 어이없어서일까? 그 분들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신 그러지마!‘로 마무리했다.


  나는 동생이 돌아와서 좋았다. 고졸 말단 사원은 나 하나였던 사무실에 누군가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말썽꾸러기지만 항상 나를 웃게 해주며 ‘언니’ ‘언니’ 따라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힘든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를 보듬으며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 처지와 상황을 보듬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외로움과 설움을 그 아이와 함께 보듬고 토닥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래 오래 함께 생활했으면 좋았으련만, 동생은 얼마 안 가 또 집을 나갔고 회사에도 연락이 없었다. 19살의 방황, 19살의 실수, 한번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던 과장님과 부장님이지만 두 번은 안 되었다. 한번을 이해해 준 것도 참 넓은 아량이었다고 나는 그 때도 감사했기에 이번엔 그분들의 결단이 당연하다 여겼고 그 뒤로 동생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집을 나간 후론 나와도 연락이 끊겨 버렸다. 

  나는 한동안 동생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그리고 많이 힘들었고 얼마 안 있어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학을 준비하겠다는 나에게 회사는 말렸지만 나는 더 나은 모습을 꿈꾸었고 더 나은 삶을 찾아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의 동생은 왜 집을 나갔던 걸까?’ 

‘어린 나이의 치기이며 방황이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더 나은 삶을 꿈꾸었던 걸까?’


27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엄마, 아내, 며느리의 역할 속에서 또 다시 나로서 무언가 만들어내고 이루어내는 일이 여전히 고단하고 힘들지만, 그 때 꿈꾸었던 것처럼 나는 꿈을 꾸며 나아간다. 동생도 그 때의 방황을 접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종종 그 아이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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