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즐거운 소리들은 뒷마당에서부터 들려온다. 베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일 새벽을 기다리게 한다.
4년 전 지인께 아주 작은 포도나무 모종과 라즈베리 모종을 받았다. 그때도 여름날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모동을 심고서는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워낙 작은 사이즈라서 내심 그랬던 듯싶다. 1년을 아무런 기척 없이 보낸 라즈베리는 그다음 해부터 연녹색의 어린 잎사귀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서히 키가 자랐고 어느 날부터 연한 핑크빛의 꽃을 피웠다. 아주 작고 섬세한 모양은 단번에 어린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꽃이 다 지고 열매들이 맺혔을 때는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던 어린아이가 동화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커다란 선홍빛의 열매들 속에 뛰어노는 작은 소녀처럼.
라즈베리와의 인연이 깊어질 무렵, 이상한 일이 찾아왔다. 조금은 다른 느낌의 꽃이 옆에서 피고 있었다. 라즈베리의 작고 섬세한 여린 감성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좀 더 강한 힘의 야생미까지 느껴지는 꽃모양에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것은 마치 곁을 지키고 있는 애인과도 같았다. 누군가의 습격에 대비해 보호하고 있는 듯했다. 혹시 새벽녘, 남몰래 담장 너머로 넘어와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속이라도 한 것인지, 블랙베리의 출현은 불쑥 나타난 사랑꾼이었다.
모든 관계는 우연처럼 시작되어 필연이 되거나, 필연처럼 보이다가 스쳐 지나간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도 하며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 경계는 때로 끝내 구분되지 않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깜짝 만남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지도 못한 시점에 또 한 번의 블랙베리를 만난 것처럼.
살다 보면 때로는 뜻하지 않은 것들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주기도 한다. 혹은 기쁨과 행복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무런 기척도 없던 지인은 어느 날 갑자기 블랙베리 모종을 건네주었다. 건강하고 길쭉한 초록잎이 달린 모종을 잘 키워달라며 부탁을 하시고는 홀연히 먼 지역으로 떠나셨다.
작년까지 새벽마다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던 라즈베리는 보이질 않는다. 몇 가닥의 줄기와 잎사귀만 남아있다. 한동안은 매일 같은 자리를 먼저 보게 되었다. 이제 그 옆에서 굵고 길게 뻗은 블랙베리가 넓적한 이파리를 펼쳐가며 덩굴을 이뤘다. 주렁주렁 매달린 싱싱한 열매들은 눈에 잘 띄지 않게 몸을 숨긴 채 이곳저곳에서 자라난다. 연녹색에서 붉은 나무색, 그리고 윤기 나는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한다.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듯 매일 새벽 마주할 때마다 완벽한 열매로 익어있다. 라즈베리는 블랙베리에게 당부라도 한 모양이다. 대신 한여름동안 부지런히 살아달라고.
모두가 잠들어있는 고요한 새벽, 뒷마당 펜스 곁에는 온전히 하루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리들이 들린다. 기다란 줄기를 들춰내면 어디선가 새로운 새까만 열매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건넨다.
“ 오늘도
굿모닝”이라고.
곧이어 날아든 부지런한 벌 한 마리도 똑같이 인사를 건넨다.
“ 좋은 아침이야”
일러스트
by Eunjoo D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