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사생아 '영화'_<버드맨>

by 연속성

영화는 유일하게 생일이 있는 예술이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에서 탄생한 영화는 카메라라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모태인 카메라의 특성을 반영한다. 카메라는 지나가버리는 현재를 기록으로 남겨버린다. 초기 영화는 독립적인 장르로 성립하기 이전 연극을 기록하는 기능을 수행하곤 했다. 현재 영화가 연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예술 장르로 성립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탄생 이후 100년이 지나 제작된 영화 <버드맨>(2014)은 연극에 대한 영화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 진짜 예술인가를 두고 다투는 장르 간의 싸움이며 그 중앙에는 '배우'라는 존재가 걸쳐있다. 오늘 날 '배우'라는 직업을 언급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은 영화 배우, tv 시리즈에 출연하는 배우 즉 카메라에 의해 기록되고 전자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배우이다. 연극과 영화가 그 뿌리부터 유사성을 가지고 있듯이 배우라는 직업 역시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으나 연극 배우와 영화 배우 두 갈래로 갈라지는 형상을 보이게 되었다. 작품에서는 연극 배우와 영화 배우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비교한다.



주인공 리건 톰슨은 작 중 <버드맨>이라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둔 영화배우이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꺾여버린 커리어와 재정난을 돌파하기 위해 브로드웨이 연극에 도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가 고용한 연극 배우인 마이크 샤이너는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리건을 능가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리건의 연기를 폄하한다. 마이크는 영화를 연극과 견주어 서커스라고 비유한다. '아무리 저질이더라도 제대로 포장만 하면 대중의 열광을 받은 것은 영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씨름하는 진짜 예술은 연극'이라고 말한다. 마이크로부터 시작된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 연극과 영화, 배우와 무비스타, 예술과 상업의 이분법은 앞으로의 전개를 관통하는 주요 테마가 된다. 이어서 비평가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연극과 영화의 이분법에 그치지 않고 예술에 대한 고찰로 논의가 확장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 의해 리건은 배우가 아닌 연예인 '할리우드 쫄쫄이'에 그치고 만다.



리건은 이러한 주변의 평가에 의해 자아의 분열을 겪는다. 연극에 도전하는 영화배우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갈등한다. 이 내면적 갈등은 감독의 독특한 연출법에 의해 외재화된다. 그의 과거의 영광과 무비스타로서의 에고를 표상하는 버드맨으로서의 자아와 현재 연극배우로서의 리건 두 자아는 지속적으로 충돌하며 갈등한다. 버드맨의 에고는 리건에게 '넌 예술가가 아닌 할리우드의 무비스타', '넌 사기꾼에 불과해 곧 들통날거야'라는 둥 그의 내적 불안과 주변의 비판을 지속적으로 리건에게 주입한다. 리건 스스로도 연극배우로서의 자신의 자질을 의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리건은 배우이자 인간으로써의 본인과 캐릭터 버드맨으로서의 자신을 구분하려하지만 불확실한 연극의 성공 여부를 앞두고 그의 삶의 거대하지만 유일한 성취인 버드맨을 쉽게 떨쳐낼 수 없다. 주인공의 정신분열적 두 에고의 알력 다툼은 감독의 연출에 의해 영화 문법 상의 기술, 판타지적으로 연출되다가 급작스럽게 극 내부의 현실로 전환되며 리건의 정신분열적 상황과 내면 심리를 부각한다. 영화적 연출인 듯 극 외부의 관람자들의 착각을 유도했다가 깨어버리는 식의 연출은 모든 판타지적 상황이 주인공의 정신병리적 환상임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준다. 내부적 갈등의 절정을 앞두고 다시 만난 비평가에 의해 리건의 에고는 또 다시 부정당하게 된다. 그의 배우로서의 진정성을 상징하는 카버의 메세지가 담긴 냅킨은 술에 젖어 바에 초라하게 남겨지며 리건의 좌절을 상징한다.



바를 나온 리건의 귀에 들리는 미치광이의 '인생은 시간이 지나면 말없이 사라지는 배우에 불과,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찬 바보의 이야기'라는 대사는 리건의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고민을 인간의 삶에 대한 논의로 확장시킨다. 이후 그의 내적 갈등은 절정이 되고 목소리로만 나오던 버드맨은 외형적 형상을 갖추고 극 내부에 실체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오프닝 공연이 시작된다. 오프닝 공연의 마지막 장면만을 앞둔 리건은 아내에게 버드맨 목소리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과거 자살을 하려던 경험을 언급하고, 인생의 회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딸 샘의 출산 장면을 찍지 말았어야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함께 했었어야 하는데' 작품의 주제의식을 극대화하는 대사이다. 영화의 본질인 '촬영' 즉 기록은 그 상황에 몰입하지 못하고 담기는 것에만 신경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을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와 sarcasm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영화 매체에 대한 비판이자 연극과 영화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연극은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로 현장에서 배우와 관객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극이 올라가고 그 공연은 참여자들의 기억에만 남은 채 휘발된다. 그러나 영화는 기록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영사된다. 연극의 3(4)요소가 배우, 희곡, 무대 관객이라면 영화는 필름, 스크린, 관객으로 배우를 필수로 하지 않는다는 점, 무대와 스크린이라는 다른 전달 방식을 취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두 예술 장르가 가진 특이성을 되새길 수 있다.



이어지는 '난 내 삶 속에 없었어'라는 대사는 항상 '찍혀지는' 대상이 되는 영화배우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리건은 총을 챙겨 극의 막바지 무대에 오른다.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하지?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매일 다른 남자가 되려고 애쓰면서 산다고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여기 없다고' 연극의 마지막 대사이자 리건이 실총으로 무대에서 자살을 시도하기 전 마지막 대사이다. 상대 배우를 향한 대사이지만 리건이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독백이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이다. 리건은 방아쇠를 당기고 관객들은 환호한다. 메소드 연기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극과 실제가 구분되지 않는 연기, 배우라면 누구나 도전하는 지향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배우로서의 리건의 삶과 인간 리건으로서의 삶은 포개지게 되며 결국 이 모든 내용이 인간의 삶 전반에 대한 내용으로 귀결된다.



리건의 마지막 무대는 굉장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연극을 망치겠다는 비평가는 극찬을 내놓고 대중들은 환호한다. 전처와는 화해하게 되고 딸과도 사이가 좋아진다. 리건은 원하던 바를 성취했다. 연극 배우로서의 성공, 인간 리건으로서 가족들과의 화해,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영화 커리어의 발판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동업자 친구는 이 모든 것을 두고 기쁘지 않냐고 묻는다. 리건은 수술로 바뀌어버린 코를 확인한다. 새 부리 같은 큰 코가 달려있다. 버드맨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고 리건은 창 밖의 새들을 기쁜 눈으로 바라보다 창 틀에 선다. 마치 그의 딸 샘이 극장 옥상에 걸터앉아있던 것처럼. 그리고 이어서 빈 방에 들어온 샘은 리건을 찾다가 창 밖을 오려보며 경이로운 표정을 짓는다. 창 밖에서 비상하는 리건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으며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감독의 지속적 연출 방식을 근거로하면 리건의 투신은 비상이 아닌 자살로 이어졌을 것이다. 연출인 듯 하지만 결국에 모든 판타지적 요소는 실제로 극 내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코미디 장르라는 버드맨의 특성 상 마지막을 다소 열린 결말처럼 연출했을지는 모르지만,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주로 인간의 고독과 괴로움을 그리는 이전 작품의 다소 염세적인 성향을 생각해보았을 때 자살이라는 결말이 더 합당할 것 같다.



연극과 영화, '진짜' 예술, 배우라는 예술인으로서의 직업 이 모든 이야기는 이분법적으로 갈등하고 충돌하며 다투는 듯 보이지만 결국 인간 삶의 무의미성 앞에 하나로 융합되며 그 다툼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무비 스타 리건의 삶이 그렇고 연극 배우 리건의 삶이 그렇고 인간 리건의 삶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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