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21년에 쓴 글
대화 중에 자연스레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늘상 무난하게 음악 감상, 영화 보기 등으로 답하고는 한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일이다… 그리고 나는 자주 업무태만의 위기에 놓인다…)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고 인생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여유 시간에 무엇 하기를 가장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답이 달라진다. “제 취미는 산책입니다.”
시간만 있다면 나는 걷는다. 터널을 걸어서 통과하고, 한강을 걸어서 건너고, 차도 옆 갓길에서 걷고, 도시를 넘나들며 걷는다.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걷기 시작해서 붉게 노을 질 때까지 걷기도 한다. 봄과 가을을 좋아하고 여름과 겨울을 싫어하는 이유도 걷기 좋아서, 그리고 걷기 나빠서다.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굳이 꼽자면 명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이 많은 날엔 많은 대로, 생각 없는 날엔 없는 대로, 생각하기 위해 걷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걷고 소화하기 위해 걷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걷는다. 같은 목적지라도 어제와 다른 길을 탐색해보는 재미도 있고, 조바심 나게 하는 것이 없을 때의 여유를 만끽하는 재미도 있고, 그렇게 이유 없이 걷는 게 기쁘고.
여행을 가서도 당연히 걷는다. 안동과 부산에서, 파리와 뉴욕, 런던에서도 쭉 걸었다. 그곳에서는 버스를 타지 못해 걸었고, 길을 잃을까 무서워 걸었다. 낯선 곳이 주는 막연함이 좋아 걸었고, 여전히 목적 없이 걸었다. 여행은 어쩌면 산책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버스와 택시의 속도로는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다 보니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찾았다. 버스나 지하철, 택시를 탈 때와는 다르게 걸으면 흔들리는 몸이 느껴진다. 걸음마다 각도와 속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살아있음이 인식되는 순간이 온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생각함으로 존재를 인식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육체의 움직임으로 살아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유물론과 관념론을 떠나서, 그러한 일차원적 사고가 필요할 때가 있다. <시와 산책>을 쓴 한정원 작가는 발목을 접질려 절대 걷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고 절망하며, 절규했다. “걷지 말라니요! 걷지 않고 어떻게 숨을 쉬나요? 걷지 않으면 내 마음은 어디에서 사나요?”
책 이야기도 없이 개인적인 산책론만 길게 늘어놓아 황당할 수도 있겠다. 이런 글을 쓰게 만든 원인이 바로 이제 소개하려는 책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니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서울과 파리 이곳저곳을 산책하며 떠올린, 혹은 산책하기 위해 담아두었던, 어쩌면 산책과 연결하기 위해 기록했던, 아니 그저 산책을 관통하거나 산책의 주변부를 스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책이다. 작가가 들어가는 글에서도 말했듯 이 책은 “산책이나 도시라는 말을 중심으로 잠재되어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책이다. 일종의 산책기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산책기라고 하기에는 한 사람의 오랜 사유와 철학이 수많은 작품과 인물의 인용과 더불어 담겨있다.
이 책을 쓴 정지돈 작가는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등의 소설과 <문학의 기쁨>(공저), <영화와 시> 등의 산문집을 썼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출판사 문학동네로부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현대판 에세이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주간 문학동네에 약 7개월간 연재한 원고를 묶어 출간한 책이다.
작가는 도시 산책자, 만보객 등으로 번역되는 파리의 ‘플라뇌르’에서 시작하여 플라뇌르의 한국형 버전인 구보, 공쿠르상으로 유명한 공쿠르 형제, 산책과 떼 놓을 수 없는 로베르트 발저, 발터 벤야민, 소요학파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데려온다. 또한 서울과 파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글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난 그냥 소설가의 산책 이야기를 읽고 싶었을 뿐인데, 산책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어?’싶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이것이 이 사람의 산책방식이 아닐까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산책하지는 않으니까.
걷는 행위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동시에 ‘걷는다는 행위’만이 남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의 근본적 의의를 가진다. 또한 산책은 그 목적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으며 걷고 머무는 것(p.91)’에 있기에 ‘불확실함과 모호함의 반란으로 우리를 잠시나마 일종의 무한 속으로 밀어넣는다(p.91)’.
산책이 취미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나 싶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으며 걷고 머무는 것”. 항상 크고 작은 목표가 있어야 하고, 목적지가 뚜렷해야 하며, 목적지를 향해 구체적이고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워야 따라갈 수 있는 시대 속에서 가끔은 목적지를 잃는 기쁨.
두 시간 세 시간, 오랜 산책이 팔자 좋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운동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정말 ‘산책’만 하는 게 필요할까, 혹은 중요할까. 한정원 작가는 <시의 산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長詩)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들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느리게 지어지는 나는 산책의 시간이 쌓이며 그렇게 완성된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처음 책을 집으며 기대했을지 모르는 ‘예술가의 낭만 산책 in 파리’류의 느낌은 남아있지 않겠지만, 미술과 문학, 건축과 혁명, 영화와 철학을 넘나들고 서울과 파리를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작가의 사유에 발맞춰 확장된 당신의 사유의 세계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 세계의 끝을 천천히 산책해보기를 바란다. 목적지는 두지 말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당신을 일종의 무한 속으로 밀어 넣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우리는 서서히 그 어디에도 없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