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나는 오늘도 그곳에 와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지만 꿈속에선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왜 자꾸 이곳에 오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추억이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어릴 적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 장소에 나는 어른의 모습을 한 체 서있다.
지금부터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그곳은 강원도 작은 시골 마을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작로길이 아닌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디좁은 흙길을 따라 50미터 정도 안으로 들어가야지만 겨우 마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흙마당 왼쪽으로는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밤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비록 키는 작을지언정 씨알만큼은 아주 굵고 커다란 밤을 품어냈다. 하지만 작은 체구로 무리하게 키운 탓인지 속 빈 강정처럼 싱겁고 맛대가리라곤 일도 없었다. 밤나무를 심은 당사자 할아버지께서는 맛도 못 보고 돌아가셨는데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밤이 떨어지는 계절이 찾아오면 새벽같이 일어나 우리 집의 맛없는 밤은 제쳐두고 바로 옆집인 효주네와 백 미터 남짓 떨어져 있던 정미언니네까지 밤을 주으러 다녔다. 정미언니네 밤나무는 우리 집 밤나무보다 열 배는 더 컸는데, 나무에 비해 밤은 작았지만 그 맛이 어찌나 달고 고소하던지,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달콤함이 퍼지며 침이 고여온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 ‘ 는 속담처럼 일찍 일어나는 자가 밤을 많이 주울 수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이 많은 나는 집 앞 전봇대에서 시작된 전기합선으로 뒷마당에 불이나 소방차까지 오고 한바탕 난리를 쳤던 날에도 세상모르고 자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새벽 기상 만렙의 달인들인 할머니들보다 먼저 일어나 밤을 주웠다는 건 분명 보통일은 아니었으리라.
입에 한가득 도토리를 물고 있는 다람쥐 마냥 나는 양쪽 바지 주머니가 빵빵해지도록 밤을 가득 채워 넣었다. 당시엔 이게 왜 이렇게 재밌고 스릴 있던지 틈만 나면 하이에나처럼 어슬렁어슬렁 동네 밤나무 아래를 돌아다녔다. 가끔 무서운 정미언니네 할머니한테 꼬리가 밟혀 들키기라도 한 날엔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바빴지만, 할머니의 무서운 호통도 밤 줍기에 대한 나의 열정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지나가다 밤나무만 보이면 그 아래를 그냥은 못 지나치니 도대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전생에 굶어 죽은 다람쥐가 환생 한건 아닌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밤나무 좌측 대각선 방향으로는 6~7마리 내외의 소들이 살았던 외양간이 있다. 이곳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생명의 잉태와 출산, 성장, 먹고, 자고, 싸고, 죽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소들의 삼신할매 격인 수의사 선생님이 오시는 날엔 아주 신기한 구경거리가 많았다. 인공수정과 출산의 현장이 특히 그랬다. 과거에 비하면 소들이 자라는 환경이 좋아져서 우리 안에서 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옛날만 해도 좁은 외양간에서 코뚜레를 하고는 고삐에 묶인 채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살던 환경이었다. 동물권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대로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으니 문제라고 아무도 인식을 못했다. 지금의 기준에서 바라보면 너무 가혹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그나마 동물들의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때나 몇십 년이 흐른 지금이나 여전히 시골의 많은 개들이 묶여 있는 이 현실이 때론 안타깝고 슬프다.
외양간에 묶인 소들이 할 수 있는 자세라고는 앉거나 서기 정도만 가능했다고 보면 된다. 재테크를 위해 암소들만 키우는 집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설령 수소가 있다고 한들 자연적 임신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힘이 변강쇠처럼 세고 종족 번식 욕구가 아주 강한 수놈이 욕정에 사로잡혀 고삐를 댕강 끊어 버리고 거사를 치르지 않는 이상은 임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소들의 번식과 출산을 위해서는 수의사 선생님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또렷하게 모든 과정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어렴풋한 기억 와중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몇 장면이 있다. 수의사 선생님이 고무장갑처럼 생긴 아주 긴 장갑을 한쪽팔 끝까지 끼고는 암소 자궁 안으로 팔을 쭈욱 밀어 넣어 인공 수정을 했던 장면, 그리고 송아지가 태어날 때 난산으로 고생하던 엄마소가 지쳐 더 이상 힘을 못 쓰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슈퍼맨처럼 나타난 수의사 선생님이 송아지 앞다리에 밧줄을 묶고는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사람들 몰래 참기름 칠이라도 한 건지 수의사 선생님의 손길이 닿자마자 이내 송아지가 미끄러지듯 속 시원하게 빠져나오던 모습이 생생하다. 정신 차린 어미가 태반을 제거하고 송아지를 핥아주는 동안 송아지 녀석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 서기 위해 용을 쓰고 또 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일어나 힘차게 엄마 젖을 빨아대던 송아지를 보고 있자면,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걸음마를 떼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 하찮고 미약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외양간 앞에는 볏짚 더미가 집채보다 높게 쌓아져 있었는데, 짚단은 사 남매 대학 밑천인 소들이 겨우내 먹을 양식이었다. 볏짚을 먹고 살찌워 늘어난 무게만큼 소들이 짊어진 무게도 같이 무거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볏짚더미 높이가 대략 2미터 남짓되었을 것 같은데, 당시 어린 내 눈에 비친 더미는 에베레스트 같이 높아 보였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아간 초등학교 운동장을 보며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게 기억하고 있던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었나 하며 새삼 놀랐던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