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삼 년 후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집안에 큰 경사가 난 것이다.
난 당시 상황을 기억 못 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분명 성대한 동네잔치가 벌어 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동안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구박받으며 움츠려 살았던 엄마의 어깨가 오랜만에 활짝 펴졌으리라. 애를 셋 낳고도 몸조리 한번 한적 없이 바로 밭일에 집안일까지 해야만 했던 엄마였는데, 할머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주를 품에 안겨주었으니 드디어 친정에 가서 몸조리 좀 하고 오라는 시어머니의 하달이 떨어졌고, 엄마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몸조리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위로 언니 둘과 아래 남동생 사이에 낀 삶이란 여러모로 억울하고 서럽고 경제적으로도 불이익을 많이 당했던 힘든 삶이었다. 우선 셋째 딸이라는 이유로 나만 백일잔치, 돌잔치를 안 해줘서 그 흔한 사진 한 장도 없다는 게 너무 서러웠고, 심부름도 아들은 열외, 나보다 머리가 굵은 언니들은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제일 만만한 내가 콩나물, 두부, 담배 등등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야 해야 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가장 큰돈을 벌 수 있었던
설날이면 언니들은 첫째 둘째라고 많이 받았고,
남동생은 아들이라고 더 많이 받았다. 중간에 낀
나의 설날 수금 봉투는 내 존재만큼이나 초라하기 짝이 없게 가벼웠다.
가끔 우리 집에 아들을 셋이나 둔 아빠 친구분이 놀러 오시고는 했는데, 그분이 오시면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저씨 집에는 딸이 없어서 그런데 아저씨 아들 한 명이랑 너랑 바꿔야겠다. 네가 우리 집으로 오고 아저씨 아들 한 명은 이 집으로 오고. 어때? 아저씨 집에 가서 같이 살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아저씨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셨지만, 주변에 있던 어른들은 마치 처음 들은 이야기 마냥 깔깔 거리며 재밌다고 웃으셨다.
아마도 기겁하는 내 표정이 웃겨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끔찍하리만큼 무섭고 싫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앞선 일련의 사건들은 사춘기 시절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땐 뭐가 그리 서러웠던지 억울함에 혼자 서러운 눈물을 많이 삼켰다.
왜 나는 억울하고 서러웠던 일들만 기억하고
있을까? 셋째라서 누렸을 행복한 순간도 많았을
텐데, 그런 순간은 하나도 기억나질 않고 순전히 억울하고 서러운 기억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내가 나온 몇 안 되는 흑백 사진 속에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큰언니가 나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는 귀한 사진이 있다. 둘째 언니도 내 옆에 앉아 거들고 있다. 둘 사이 앉아 있던 나는 아기 새처럼 숟가락 크기 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입을 쫙 벌리고 받아먹고 있다. 한 장의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분명 따뜻한 보살핌을 많이 받았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기억이 없다.
그런 기억들은 숨 쉬듯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억을 못 할 수도 있다.
언니들이랑은 이년 터울씩 차이가 난다. 내가 7살 때병설 유치원에 입학했으니까 언니들은 초등학교
2학년과 4학년 때였을 때다. 당시 유치원 버스도 없던 시절이니 집에서부터 한 시간도 넘게(7살 수준의 걸음걸이라면) 걸어야 병설 유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일곱 살 아이가 혼자 걸어갔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밥을 먹여주고 있던 사진 속처럼 한쪽은 큰언니 손을 반대쪽은 작은언니 손을 잡고 그 먼 길을 함께 걸어갔을 것이다. 자의던 타의던 간에 몇 년을 언니들의 보살핌 속에서 등하교를 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셋이 손을 꼭 잡고 등교하는 모습을 한 번은 보고 싶다.
과거로 돌아가서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안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속에서부터 무언가 뭉클한 기분이 올라온다.
단지 기억을 못 할 뿐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은 숨 쉬듯 항상 내 옆에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