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다.
남편이 내 얼굴을 보고 데려간 건지 안 보고 데려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셋째딸 하면 따라오는 수식어는 예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없고 정확한 출처도 없는 말이지만 지극히 개인적 의견으론 세대를 거듭해 오면서 사람들의 경험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왜 첫째도 둘째도 아닌 셋째 딸일까?
단 한 번도 궁금한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송편을 처음 빚어 본다 생각해 보자. 물론 처음부터 잘 빚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엔 모양도 삐뚤 삐뚤 하고 속이 터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일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실수 없이 예쁜 모양의 송편을 빚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세 번째 딸이다 보니 완성도가 높아진 건 아닌지? 아니면 다년간의 출산 경험으로 뱃속에서부터 편안하게 있다가 태어날 때도 순풍 순풍 태어나서 부모님과 언니들의 정성 가득한 보살핌 속에서 주름진구석 하나 없이 자랐기 때문에 그랬던 건지, 아무도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이 모든 가설은 과학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근거도 없다 보니 사실에 부합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셋째 딸들이 우겨서 그런 말이 나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처럼 처음부터 못생긴 셋째로 태어나 더 이상 못생겨지기 어렵다 보니 처음보다는 예뻐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도 예뻐졌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을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아들이 귀하던 시절 못생긴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 한 문장에 내가 자라면서 받았던 설움과 힘듦이 모두 녹아있다.
외할머니께서 살아생전에 나만 보면 하신 말씀이 있었다.
"너희 엄마가 애를 낳았다길래 한 달음에 달려와서 보니, 니 엄마는 이불 뒤집어쓴 체 울고 있고, 넌 방 한쪽 구석에서 악을 쓰며 울고 있더라. 엄마는 서러워서 울고 너는 배고파 죽겠다고 울고 있는데 너희 엄마는 젖줄 생각도 없이 같이 울고만 있더라. 그걸 보고 있는데 둘이 어찌나 가엾고 측은하던지 슈퍼로 곧장 달려가 분유 한통을 사다가 타서 널 맥였다."
어릴 때 이 말을 듣고 외할머니의 따뜻함에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 감동은 한순간에 파괴되기도 했다. 내가 두세 살 무렵 엄마가 날 업고 친정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외할머니께서 그런 나를 보더니
“어디서 튼실한 메주를 업고 왔냐?”라고 하셨단다.
불쌍하고 가엾던 나는 몇 년 사이 튼실한 메주로 변해 버렸다. 외할머니의 말을 좋게 해석하자면
‘비록 얼굴은 조금 못생겼지만 잘 먹고 잘 자라서 다행이다’라는 깊은 뜻이 내포된 말로 해석하고 싶다.
그땐 비록 수모를 당했지만 자라면서 쌍꺼풀도 자연스럽게 생기고 얼굴에 젖살도 빠져서 지금 내 얼굴엔 다행히 어릴 적 얼굴이 남아있지 않다.
생긴 건 그렇다 치고 먹는 건 또 어찌나 잘 먹었던지 어른 얼굴보다 큰 부침개 세장을 세 살짜리가 앉은자리에서 다 먹어 치웠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시간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면서 이 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어지간히 놀라셨던 모양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세 살부터 전을 그리 잘 먹던 나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항상 막걸리에 전을 꼭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여든까진 아직 곱절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이렇듯 속담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 몇 백 년 간의 경험 데이터가 누적된 결과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건 분명 축복받을 일 인데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나와 엄마는 그런 푸대접을 받았다. 굳이 잘못이 있다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게 잘못일 것이다. 비록 축복받지 못한 딸로 태어났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름부터 너무 슬프고 잔인한 후남이, 말자, 끝순이(이름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가진 의미가 너무 슬프도록 잔인하다)가 아닌
우정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