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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랭 Sep 04. 2023

고양이

  둘째 아들 녀석이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다.

키우고 싶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지만 선뜻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도 동물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키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려면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나는 아들 둘도 버거운 상황에 고양이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모든 돌봄과 뒤처리는 내 몫이 될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등장했다. 남편이 아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키우자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큰 마음을 먹고 결단을 내렸다.




사랑스러운 치즈

그렇게 우리 집에 새 식구 치즈가 들어왔고 수 년째 함께 잘 지내고 있다. 치즈 이 녀석한테는 남다른 능력이 몇 가지 있다. 강아지처럼 방울을 물고 와서는 던져 달라고 한다거나, 배고프면 간식 서랍을 몰래 열어 츄르를 훔쳐 먹기도 한다. 그중 가장 뛰어난 능력이라고 한다면 털을 뿜어내는 능력일 것이다.


물론 모든 고양이가 가진 능력이긴 하지만 말이다. 집안 곳곳에 고양이 털이 없는 곳이 없는데 가끔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냉장고 안 같은 곳이랄까? 처음에는 털에 적응하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았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잘 자라 다오' 하는 마음으로 함께 지내고 있다. 불편함을 잊을 만큼 치즈가 우리에게 주는 행복이 너무나 크다 보니 지금은 주변 사람들한테 적극적으로 집사가 되어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난 집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아니 키웠다기보다는 길냥이가 우리 집을 간택해서 살았다는 말이 더 맞는 말 일 것 같다.

이름도 없이 그냥 “나비야”, “야옹아”로 불리며 사람을 아주 잘 따르던 고양이였다.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항상 우리 집 반경에 머무르며  새끼도 낳고 함께 살았다.




시골집 특성상 쥐들이 많았는데, 낮에는 거의 존재감 없이 숨어 지내던  녀석들이 밤만 되면 얼마나 존재감을 발휘하던지, 부모님과 사 남매가 안방에 일렬로 쪼르륵 누워 잘 준비를 하고 ’딸깍‘ 불을 끄자마자 마치 그 소리가 경기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로 착각한 듯 천장에서는 쥐들의 축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다다다” 달리는 소리에 식구들 모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가족 모두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서 나온 묘책이 바로 고양이를 천장으로 올려 보내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발하다기 보단 참 단순 무식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우선 천장 한쪽 구석에 고양이가 들어갈 만한 네모난 작은 구멍을 낸 후 쥐들이 달리기를 할 때마다 심판처럼 고양이를 올려 보냈다.

처음엔 영문도 모른 체 당황한 얼굴을 한 고양이가 안 들어가겠다고 발톱을 세우고 버둥버둥 난리 치는 바람에 겨우 겨우 올려 보낼 수 있었지만, 이후 몇 번의 경험이 쌓이고 나서는 마치 진짜 심판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막중한 임무를 지닌 얼굴을 한 체 의기양양하게 올라가곤 했다. 고양이가 올라가자마자 쥐들의 다급한 후다닥 발소리와 함께 경기는 급하게 종료되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의 싸늘한 냉기가 아래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임무를 완료한 고양이는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어깨를 한껏 치켜 세운체 마치 자기는 “공짜 밥만 먹는 그런 파렴치한 고양이는 아니라고요.” 하는 표정을 하고는 당당한 모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 당당함과 도도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엄마의 영역인 주방에 들어가 한바탕 저지레 난리를 쳐놓은 날이면 엄마한테 된통 혼나서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고양이가 높은 담장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린 내겐 너무 위험해 보였다. 나는 구조를 해주겠다며 강제로 고양이를 담장에서 끌어내렸는데, 이에 화가 난 고양이가 내 입술을 할퀴었다. 하필 연약한 부분인지라 입술에서는 새빨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너무 아프고 화가 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양이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을 테다. 그 정도 높이는 고양이한테 아무렇지도 않은 높이였을 텐데 별안간 어린 인간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잡아 끌어당겼으니 황당하고 화가 나서 본의 아니게 어린 인간의 입술에 상처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고양이한테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얼마나 아프고 속상했던지 울면서 고양이랑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네가 너무 위험해서 구해주려고 한 건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해 ” 아마 이런 대화였으리라.  그러다 내 감정에 못 이겨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양이 뺨을 때렸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격정적인 따귀는 아니었지만, 당시 나는 고양이를 사람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둘은 따사로운 저녁 햇살을 받으며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사진처럼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당시 고양이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안해했을까? 아니면 나한테 왜 이러냥? 했을까? 갑자기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 유독 사고를 많이 쳤던 고양이에게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이야 키우던 반려동물 유기하면 범죄에해당되는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80년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음을 먼저 이야기한다.


이야기에 앞서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고양이를선택해서 키운 게 아니라, 집 없는 길냥이가 떠돌다가 우리 집을 간택한 것이고, 그런 고양이가 불쌍해서 밥을 좀 챙겨주는 그런 관계였다.

엄마와 고양이는 마치 톰과 제리 같은 사이었다고나할까? 혼날 줄 뻔히 알면서도 유독 엄마의 영역인 주방에 들어와 난장을 피는 경우가 많았는데 참다 참다못한 엄마가 하루는 화가 많이 났는지 고양이를 박스에 넣은 후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싣고는 집에서부터 십분 이상 걸리는 마을 끝까지 가서 고양이를 풀어주고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녀석은 엄마를 비웃기라고 하듯 너무나도 태연하게 집마당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톰과 제리의 톰이 불쌍하다는 것을 그리고 아기 공룡둘리의 고길동이 짊어진 무게를 알아 버린어른이 되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치즈를 키우다 보니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고양이와의 많은 추억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도 치즈와 행복한 추억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바래지고 희미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언젠간 어른이 되었을 때 불현듯 잊고 지낸 고양이와의 추억을 다시 꺼내며 나처럼 행복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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