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이야기 속 '소망의 거울'은 마음 깊은 곳 갈망을 비춰 보는 이를 미치게 만든다. 요즘 의학계를 보면, 비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꼭 그 거울 같다. 지난 한 달 사이 쏟아진 십여 편의 논문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아직도 비만이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혼란은 위고비(Wegovy)나 마운자로(Mounjaro) 같은 획기적인 치료제가 등장한 지금 더욱 심해졌다. 왜일까?
첫째, 효과적인 치료제가 생겼다고 해서 '누구를 치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저절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절실해졌다. 이 비싼 약을 누구에게 써야 할까? BMI만 보고 결정할 수 있을까?
둘째, 치료제의 극적인 효과가 비만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던진다. 주사 한 방에 체중이 15-20% 줄어든다면, 비만은 정말 의지력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호르몬과 뇌의 문제였을까?
셋째, 약을 끊으면 다시 살이 찌는 현실이 비만의 만성질환적 성격을 드러낸다. 고혈압약처럼 평생 맞아야 한다면,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이 또한 명확한 정의 없이는 답하기 어렵다.
비만은 단순히 살이 찐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명확히 그려내지 못한다. 어쩌면 비만이 하나의 병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과 결과가 뒤엉킨 실타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실타래에 '치료'라는 새로운 실이 더해져,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올해 초 랜싯 위원회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비만을 두 가지로 나누자는 것이다. 아직 증상이 없는 '전임상적 비만'과 실제 문제를 일으키는 '임상적 비만'. 이전처럼 체중계 숫자나 허리둘레만 재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몸이 얼마나 아픈지를 보자는 거였다. 분명 한 걸음 나아간 생각이었다.
하지만 존스홉킨스 대학 연구팀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시작이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해요."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비만도 암처럼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 누가 더 위험한지, 누구를 먼저 치료해야 하는지 알려면 에드먼턴 분류도구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다.
(에드먼턴 비만 병기 시스템(Edmonton Obesity Staging System, EOSS): 2009년 샤르마(Sharma)와 쿠시너(Kushner)가 개발한 비만 분류 체계. BMI와 관계없이 비만 관련 합병증의 심각도에 따라 0-4단계로 분류한다. 0단계는 위험요인 없음, 1단계는 경미한 증상(경계선 고혈압 등), 2단계는 중등도 합병증(당뇨병, 수면무호흡증 등), 3단계는 장기 손상, 4단계는 말기 장애를 의미한다. 이 시스템은 단순 체중이 아닌 건강 상태를 기준으로 치료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유용하다.
참고문헌: Sharma AM, Kushner RF. A proposed clinical staging system for obesity. Int J Obes (Lond). 2009;33(3):289-295. doi:10.1038/ijo.2009.2)
비만을 정의하기가 왜 이토록 힘든 걸까?
먼저, 비만은 단순히 무거운 몸이 아니다. 유전자가 속삭이고, 환경이 유혹하며, 마음이 흔들리고, 습관이 굳어지는 복잡한 드라마다. 사람마다 그 줄거리도 다르다.
또한 언제부터 비만이 '위험 신호'를 넘어 '병'이 되는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혈압이 조금 높은 것과 고혈압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의 차이처럼, 그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까? 의학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사회와 경제까지 얽힌 문제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비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라는 꼬리표. 이런 편견들이 비만을 제대로 된 질병으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비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는 책상 위 학문적 고민이 아니다. 수백만 명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린 절실한 문제다.
그래서 우리에겐 함께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쏟아지는 연구들, 끊임없는 토론. 지금은 어지럽게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온전한 그림이 될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무리 정교한 이론도 진료실에서 쓸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과학적 정확성과 실제적 유용성, 그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환자를 중심에 둬야 한다. 비만의 정의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숫자 맞추기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건강을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학이다.
비만을 정의하는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우리가 계속 질문하고, 계속 배우고 있다는 증거다. 소망의 거울이 보여주듯, 완벽한 답을 찾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를 미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열망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 랜싯 위원회의 시도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디딤돌이다.
어쩌면 비만의 정의는 고정된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개념처럼, 새로운 지식과 함께 자라고 변화하는 것. 의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성숙해가듯, 우리의 이해도 깊어질 것이다.
"끝나지 않은 작업"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가 여기 있다. 미완성은 실패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더 완전해질 수 있는 여지.
우리는 계속 걸어가야 한다. 새로운 지침을 만들고, 현장에 적용하고,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환자들의 삶을 개선해 나가는 것.
그것이 소망의 거울 앞에서 현혹되지 않고, 현실의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