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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련일기 Aug 25. 2021

아직 잘 모르겠어

#011 비움 52회차 후기

✣ 황집중의 단련일기

나만의 실천 100일 위젯

복잡한 방에 있으니 자꾸 슬퍼져서 5월부터 매일 물건 하나씩 비우기 시작했다. 비울 때마다 (혹은 비우지 못할 때도) 블로그에 짧은 글을 남겼다.


고장 난 미니 블렌더, 화장품 통과 사용 기간 지난 샘플 화장품, 각종 행사의 기념품을 버렸다. 구멍 난 니트 양말은 텀블러 슬리브로 업사이클링했다. 꽂혀있기만 했던 책을 읽었고, 친구한테 빌린 책을 돌려주며 책장을 비웠다. 쓸만했지만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원목 의자 두 개를 당근마켓에 팔았다. 의자를 거래하며 돈과 함께 청년 요식업 컨설팅 명함을 받았다. 욕실 캐비넷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꺼냈다. 천으로 된 샤워 타올은 몇 번 쓰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쓰지 않을 거라 버렸다. 플라스틱 소재로 만든 샤워볼 대용이었는데 거품이 잘 나지 않았다. 치약 대신 쓰려고 샀던 입자가 고운 소금은 적응이 안 돼서 사용을 못 했더니 뭉쳐서 돌덩이같이 커져 있었다. 역시 버렸다.


다용도실에서 쌓여 있던 플라스틱 박스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젠장. 죄책감에 버리지 못했던 과일 케이스들을 버렸다. 봄에 먹은 딸기들. 입안에 머물던 잠깐의 즐거움은 이미 사라졌지만, 이 플라스틱들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어딘가에서 평생 존재할 거다. 플라스틱 케이스는 버려졌지만, 죄책감까진 버리지 못했다.


표면이 벗겨져 부스럼이 생기는 핸드백은 옷장 안에 처박혀 있다가 사촌 동생 결혼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버려졌다. 나머지 부분은 멀쩡해서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건가 싶었다. 추억이 담겼지만 쓰지 않는 물건들도 같이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디지털 공간도 정리했다. 사진과 파일들을 옮기고 지웠다. 과거의 나를 다시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과거의 나는 작년 달력에서도 발견됐다. 탁상 달력을 생기는 대로 썼더니 3개를 번갈아 가며 썼다. 중요한 것만 스캔하고 스프링을 빼서 분리 배출했다. 또, 매일 오는 광고성 문자도 틈나면 부지런히 수신 거부했다.


매일 비포(before) 상태인 내 방 (위). 잠시 말끔했던 식탁 (아래).

사실 이번 비움의 주 목표물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서류와 인쇄물이었다. 파일이 쌓이면 생각이 과잉된다. 종이, 엽서, 안 쓰는 스티커, 다양한 크기의 각양각색 예쁜 인쇄물들. 무슨 기준으로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준이란 걸 만들 수나 있는 걸까. 주변 작가들에게 어떻게 정리하냐고 물어보니 뚜렷한 답이 없다. 우린 예쁘고 쓸모없는 것을 사랑하니까. 그래서 버리지 못하면 분류라도 했다. 어느 날은 크기 별로, 어느 날은 종류별로. 종잇조각 몇 개라도 발견해서 비우는 날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버릴까 말까. 누가 정해주면 좋겠는데. 피곤한 날엔 방에 늘어놓은 짐만 흘깃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도 많다. 비움을 하려면 물건의 필요성을 자꾸 점쳐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필요하면 다시 사자’는 마음으로 버렸더니 조금 수월해졌다.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일단 버리기로 했다. 물건을 비우는 건 결단력을 기르는 훈련일지도 모르겠다. 정리와 관련한 어느 책에서 ‘남은 물건을 통해 나의 행동이 명확해진다’던데, 궁극으로 남을 나의 물건은 무엇일까. 오십 회가 넘게 버리고 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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