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AI 시대를 잇는 공포의 심리학
오늘날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장의 사진을 찍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셀카를 남기고, 식탁 위의 음식을 기록하며, 여행지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꾸민 프로필 사진까지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진은 우리 일상의 가장 흔한 기록 수단이며, 누구도 그것을 특별히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시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갑자기 기계가 등장해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해 종이에 담아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이 기술은 한때 마술처럼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말 조선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상황과 맞닥뜨렸습니다. 카메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람의 형상을 잡아내고, 낯선 장치에서 기묘한 과정이 지나간 뒤 그 모습이 종이에 박혀 나왔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반응은 지금의 와 신기하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소름 끼치는 공포와 혼란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영혼을 훔치는 듯한 정체 모를 힘의 산물처럼 보였습니다. 귀신의 짓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글은 사진이 처음 조선 사회에 들어왔을 때 벌어진 충격과 두려움,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문화적 배경을 다루고자 합니다. 사진이라는 서구의 발명품이 단순한 기술적 사건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을 흔들고 사고방식을 변화시킨 중요한 문화적 충돌이었음을 살펴보려 합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수백 년간 이어온 쇄국 정책을 서서히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문호 개방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과 잇따라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국인의 왕래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서양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기묘한 문물이 조선 땅에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전통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근대화라는 낯선 길목에 서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신비로 다가온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진기’, 즉 카메라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고, 일상에서 접하는 도구라 해봐야 농기구나 생활용품에 불과했습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렌즈가 빛을 모아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복사한다는 개념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기계’라는 존재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사진술은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신비한 힘으로 비쳤습니다.
사진이 처음 조선에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빛과 화학 작용이 결합해 형상을 고정한다는 설명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눈앞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담은 사진은 영혼을 붙잡아 가두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떤 이는 사진을 두고 귀신의 짓이라 수군거렸고, 어떤 이는 사람의 혼백이 종이에 빨려 들어가는 것 아니냐며 두려워했습니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사진 찍기를 꺼리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양반층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낯선 장치 속에 포획되는 것을 불길하게 여기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결국 사진기는 단순한 기술의 도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 세계관과 근대적 기술이 정면으로 마주 부딪히는 사건이었으며, 조선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진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사진기는 조선의 시선과 사고, 나아가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관념에까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책은 그 질문의 흔적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조선에 사진기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대략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됩니다. 이 무렵 조선을 방문한 외국 외교사절단과 상인, 그리고 기독교 선교사들이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외교적 기록이나 개인적 기념, 혹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사진을 찍었고, 이 과정에서 낯선 서양의 기계는 조선인의 눈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이 남긴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조선 사회가 근대 세계와 조우한 가장 생생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들은 사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선교 활동 과정에서 만난 조선인의 생활상과 풍경을 촬영하여 본국 교회와 후원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사진은 글로 전하기 어려운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보여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선교의 성과와 필요성을 입증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했습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카메라는 단순한 기록 장비가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교류의 매개체이자 서구 사회와 조선을 연결하는 일종의 창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서양인의 요청에 따라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사진 촬영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사진은 자신이 가진 정체성과 존재를 낯선 기계에 내어주는 기묘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두려움 속에서 마지못해 응했고, 또 다른 이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응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사진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자 충격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진기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의 전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사회가 근대의 시선과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으며, 전통적 세계관 속에 살던 사람들이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을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잘 알려진 초기 인물 사진 가운데 하나는 1863년에 촬영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현존하는 조선의 가장 오래된 인물 사진으로 평가되며,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원군이 서양의 신기술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낯선 서양의 기계 앞에 자신의 모습을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으로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큽니다.
조선 사회에서 초상화는 단순한 인물 묘사가 아니라 정신과 위엄을 담아내는 중요한 의례적 장치였습니다. 왕과 양반, 학자와 명망가들은 자신의 권위와 정체성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사진은 붓과 먹으로 정제된 상징적 형상이 아니라, 기계적 장치를 통해 빛으로 찍힌 ‘있는 그대로의 얼굴’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사진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흔드는 낯선 기록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계적 재현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의 사진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의 징표이자, 조선의 전통적 관념과 부딪히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 속 얼굴을 보며 놀라움과 경외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림보다 정밀하다’는 감탄이 아니라, 영혼이 기계 속에 빨려 들어가 종이에 갇힌 듯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특히 정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기계 앞에 모습을 남겼다는 사실은,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권력의 위상과 권위를 드러내는 새로운 매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사진은 따라서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조선이 근대 세계와 처음으로 조우한 흔적이자, 전통적 권위와 근대적 시선이 충돌하는 현장의 증거입니다. 동시에 사진은 조선 사회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존재를, 기억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계가 인간의 형상을 가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대원군의 사진은 이러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이 근대 문물과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근대적 과학과 기술 개념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일부 개화파 지식인과 외국과 접촉한 소수 인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전히 전통적 경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농사일에서 얻는 지식, 유교 경전과 민속적 세계관,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경험이 곧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이나, 정밀한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이해할 기반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진기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렌즈가 빛을 모아 이미지를 고정한다는 과학적 설명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눈앞의 사람을 기계에 앉혀 놓고, 잠시 뒤 종이 위에 그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찍혀 나오는 장면은 납득할 수 없는 기적처럼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은 사진기를 ‘사람의 형상을 빛으로 훔쳐내는 신비한 도구’로 여겼고, 더 나아가 영혼이나 기운까지도 함께 빨아들이는 무서운 물건이라고 믿었습니다. ‘사진을 찍히면 영혼을 잃는다’는 속설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근대적 개념이 부재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문화적 해석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적 가치관, 불교적 사유, 그리고 무속과 민속신앙이 공존하던 세계였습니다. 조상 제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의례, 귀신과 영혼을 중시하는 민속 신앙,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업보를 강조하는 불교적 세계관은 서로 뒤섞여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습니다. 그런 세계관 속에서 ‘형체를 그대로 복사한다’는 발상은 자연스럽게 마술이나 귀신의 소행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은 단순히 신기한 기술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와 믿음을 흔드는 낯선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사진기의 등장은 조선 사회에서 과학적 합리성이 부재한 상황과 맞물려, 단순한 기술적 충격을 넘어 심리적·문화적 충격을 동반했습니다. 사진은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새롭게 그려주었고, 전통적 세계관과 근대적 기술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처음 사진기는 외국인 외교관이나 선교사, 그리고 일부 고위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낯선 문물을 접할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게 사진기는 실물조차 보기 어려운 기묘한 기계였습니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일본과 서양을 거쳐 들어온 사진술이 점차 조선 내에 전파되었고, 한성(서울)을 중심으로 사진관이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일부 조선인들도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진기는 여전히 ‘귀신 같은 기계’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인물의 형상을 남기는 방식은 화가가 오랜 시간 붓으로 그려낸 초상화뿐이었는데, 카메라는 단 몇 초 만에 현실과 똑같은 얼굴을 종이에 옮겨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적 재현에 경탄하기보다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영혼이 사진 속에 붙잡히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은 실제로 널리 퍼져 있었고, 특히 평민이나 나이가 많은 이들은 사진 촬영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진기의 등장은 따라서 단순한 기술 도입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전통적 세계관과 낯선 과학 기술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사진을 대하며 느낀 경외와 공포는, 새로운 문물 앞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경험하는 낯섦과 저항의 한 형태였습니다. 동시에 이는 한 사회가 근대화라는 격변기를 통과할 때 겪는 혼란과 고통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사진기는 단순히 인물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전통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문화적 충격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진을 두려움과 신비로 받아들였던 초기의 시각은 곧 변화의 서막이었으며,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수용해 가는 조선 사회의 복잡한 심리를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조선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질서와 규범을 중심으로 유지되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샤머니즘적 신앙,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민속신앙이 깊이 얽혀 있었습니다. 인간과 자연, 영혼과 삶의 질서를 설명하는 다양한 믿음이 공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 신앙 체계 속에서 사진이라는 낯선 기계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외국 기술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사진기는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전통적 방법과 달리, 사람의 형상을 기계적 장치를 통해 ‘복제’하고 ‘종이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초자연적 장치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단순히 놀랍거나 신기한 발명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 곧 영혼까지 위협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믿음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신념과 인간 심리가 맞물린 결과였으며, 새로운 기술에 대한 본능적 경계와 전통적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적 해석이었습니다. 즉, 사진기는 과학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심리적 상징물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사회에서 유교는 정치와 사회 질서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삶의 근본 원리를 규정하는 중심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몸을 단순히 개인의 소유로 보지 않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유산으로 여겼습니다. 이 사상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격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몸과 머리카락, 피부 하나하나가 부모로부터 받은 귀중한 것으로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교적 관점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체와 영혼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몸은 단순한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조상의 뜻과 생명력이 이어지는 매개체였으며, 몸을 훼손하거나 변형하는 행위는 단순한 신체적 손상을 넘어 영혼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동반했습니다.
따라서 사진이라는 낯선 기계가 인간의 형상을 ‘복제’하고 그것을 종이에 담아낸다는 개념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성한 몸과 연결된 존재가 기계 속에서 재현된다는 상황 자체가 심리적 저항을 일으키는 강력한 자극이었습니다. 이는 기술적 이해와 무관하게, 문화적·윤리적 세계관 속에서 형성된 자연스러운 불안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교적 몸과 영혼관은 조선에서 사진 미신이 생겨난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사진기를 신기한 기계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와 영혼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인식하며 자연스럽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새로운 기술이 전통적 가치관과 충돌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는 유교적 신체관과 더불어 불교와 민속신앙이 사람들의 영혼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단순히 육체로 정의하지 않고, ‘혼’과 ‘백’이라는 두 요소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혼은 정신적이고 신성한 측면을 담당하며, 백은 육체와 연결된 생명력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존재하며, 영혼은 물리적 형체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샤머니즘적 세계관에서는 혼이 더욱 민감하게 여겨졌습니다. 혼은 부적절한 상황이나 위험한 환경에서 쉽게 빠져나가거나 외부의 힘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단순한 상상이나 믿음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제로 조심하고 의례를 지켜야 하는 현실적 문제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진기가 사람의 형상을 기계적으로 ‘복제’하고, 종이에 담아내는 행위는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기술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이 자신의 혼을 흡수하거나 봉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로 인해 사진 촬영은 결코 가벼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안전과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실제적 공포로 느껴졌습니다.
결국, 불교와 샤머니즘적 혼 개념은 조선에서 사진 미신이 형성되는 중요한 심리적·문화적 배경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두려움과 경계심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됩니다. 사진은 단순한 기계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과 연결된 심리적 상징물로 인식된 것입니다.
조선 초기 사진관에서는 반드시 온전한 전신을 촬영해야 불길하지 않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신이나 과장된 속설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에서 비롯된 현실적 판단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진에서 팔이나 다리가 잘려 나가면, 실제로 그 부위에도 불행이나 손상이 미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징적 사고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즉, 현실 세계의 사건과 상징적 표현 사이의 연결고리를 믿고, 이를 통해 위험을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사고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조선 사회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상징적 사고가 나타납니다. 빨간 펜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거나, 거울을 깨뜨리면 7년 동안 불운이 따른다는 속설, 꿈에서 이를 잃으면 가족이 병들거나 죽는다는 믿음 등은 모두 인간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심리적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 반응입니다. 실제로 사건을 제어할 수 없을 때, 상징적 행동이나 믿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제하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 조선에서 사진 촬영 시 전신을 찍어야 한다는 믿음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인간이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심리적 노력의 표현이었습니다. 사진은 단순한 기계적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과 상징적 사고가 투영되는 문화적 장치였던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믿음이 조선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 사진술이 세계 여러 지역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낯선 기술 앞에서 공통적으로 두려움과 경계심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일부 부족에서는 사진사가 마을을 방문하면 사람들을 숨기고 몸을 감추는 일이 흔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사가 자신들의 형상을 기록하는 행위가 영혼을 빼앗거나 저주를 불러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도 사진 촬영은 ‘영혼 도둑질’로 간주되어 촬영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사진을 ‘혼령을 봉인하는 행위’로 이해하며, 촬영을 꺼리는 반응이 존재했습니다.
이처럼 사진에 대한 두려움은 단순한 문화적 특수성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전통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반응이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나타난 사진 미신도 이러한 전 세계적 흐름 속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진이라는 기계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을 위협할 수 있는 신비로운 장치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진 미신은 조선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으며,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과 문화적 맥락이 결합하여 나타난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진에 대한 초기 조선인의 두려움과 미신적 믿음은 단순한 비합리적 신념이 아니라 불안한 시대의 집단적 방어기제였습니다. 개항기 조선은 전통적 세계관이 빠르게 흔들리던 시기였으며, 사람들은 낯선 서양 문물과 기술 앞에서 심리적 불안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새로운 근대의 상징이자 정신적 불안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믿음 역시 단순히 웃어넘길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자신들의 정신적 틀과 가치관 안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사진이라는 기술을 기존 세계관과 조화시키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문화적 신념과 심리적 방어기제가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가 바로 사진 미신이었습니다.
이 시각에서 볼 때, 사진 미신은 조선 사회의 문화적, 심리적 적응 과정의 산물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기존 신념이 충돌할 때, 인간은 두려움과 상징적 사고를 통해 이를 해석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진을 둘러싼 미신과 두려움은 근대 기술이 사회에 자리 잡는 초기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심리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낯선 것’에 대해 경계심과 두려움을 느끼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이는 신체적 생존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신기성 회피(neophobia)’라고 부르며, 새로운 음식, 환경, 기술 등 미지의 요소에 대해 자연스럽게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경향을 뜻합니다.
원시 인류 시절, 낯선 식물이나 동물은 독성이나 포식자의 위험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무턱대고 적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지의 대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회피하는 습관은 생존 확률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진화적 유산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나 사회 변화가 등장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경험합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낯선 현상 앞에서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라는 의심을 품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불확실성을 관리하고, 자신을 지키려는 무의식적 안전 장치이기도 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사진기를 두려워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기계로 찍어낸다’는 경험은 전통적 세계관 속에서 전혀 설명할 수 없는 낯선 현상이었습니다. 익숙한 초상화와 달리, 사진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존재를 복제했기에 오히려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보편적 인간 심리의 한 형태였습니다.
결국 사진기를 향한 조선 사람들의 경계심은 특정 시대의 우연한 반응이 아니라, 인간 일반이 새로운 것 앞에서 보이는 근본적인 심리적 반응이었습니다. 낯섦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 변화와 위험을 관리하는 방식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은 새로운 정보가 개인의 기존 신념·태도·가치관과 충돌할 때 심리적 불편함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보통 세 가지 전략을 사용합니다.
(1) 부정: 새로운 사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그럴 리 없다”라며 거부한다.
(2) 재해석: 기존 신념과 충돌하지 않도록 새로운 사실을 기존 세계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3) 합리화: 모순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왜곡하거나 정당화한다.
19세기 말 조선에 사진술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바로 이런 심리적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사진이 ‘영혼을 빨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부정과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영혼은 신성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인데, 기계가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복사한다’는 발상은 전통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사진을 신비적 의례와 연결시켰습니다. 초상화가 제사와 후손 기림의 매개였던 만큼, 사진도 조상의 영혼을 이어주는 도구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반면 개화파 지식인들은 사진을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합리화하여, 서양 과학이 조선에 도입되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사진이라는 낯선 기술은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 세계관을 건드린 심리적 도전이었고, 그 과정에서 인지부조화가 집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사회는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형상’과 ‘영혼’을 존중하는 가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사 의례에서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조상의 영혼을 기리는 매개체였으며, 불교와 샤머니즘적 신앙 역시 인간의 영혼을 신비하고 신성한 것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서양에서 건너온 사진술은 그 자체로 세계관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낯선 과학 기술이라기보다, 인간의 형상을 기계적으로 ‘복제’한다는 발상은 곧 영혼까지 기계가 다룰 수 있다는 불안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안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신기성 회피(neophobia)**와 맞물려, ‘사진은 영혼을 빼앗는다’, ‘혼이 빠져나간다’는 식의 미신으로具현화되었습니다. 낯선 기술이 단순히 생리적 두려움(본능적 경계심)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화적 신념과 상호작용하면서 구체적인 사회적 해석과 금기 규범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신기성 회피와 인지부조화는 결코 조선 시대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인공지능, 유전자 편집, 가상현실과 같은 첨단 기술이 등장할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때로는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기존 가치와 세계관을 위협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갈등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두려움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낯선 기술도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과 이해가 쌓이면, 점차 일상의 일부로 자리잡습니다. 19세기 조선인에게 사진기가 ‘영혼을 빼앗는 무서운 기계’였지만, 오늘날 그것은 가장 평범한 기록 도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불안 역시, 미래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수용될 것입니다. 두려움은 결코 종착지가 아니라, 인류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심리적 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귀신이 하는 짓이라며 두려워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진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사진기가 영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빛과 화학적 원리를 이용해 순간을 기록하는 기계적 장치임이 알려지자, 초기의 경계심은 점차 호기심과 흥미로 전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사진을 신비로운 위협이 아닌,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기록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서울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사진관이 본격적으로 설립되면서 사진은 신기한 놀이이자 근대적 기록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신문 광고에는 사진관이 내세운 문구들이 눈에 띕니다. "일생의 기억을 남겨라", "자손에게 전할 얼굴을 보존하라"와 같은 표현은 사람들이 사진을 단순한 기계가 아닌 시간을 붙잡는 도구로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불안과 두려움으로 시작된 카메라에 대한 초기 반응은 경험과 이해가 쌓이면서 사회적 수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기술적 원리를 이해하고, 사진이 자신의 일상과 삶을 기록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도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진에 대한 초기 공포와 미신은,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적 열광과 근대적 수용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단순한 기록 수단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근대적 세련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중산층과 상류층은 사진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과 문명적 감각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과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관직에 오른 양반이 의관을 갖추고 사진관에 앉아 촬영한 초상 사진은 단순한 개인 기록을 넘어, 신문물에 적응한 개화된 신분의 증거로 여겨졌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화가가 그려주는 영정 초상화가 권위와 신분의 상징이었지만, 사진은 훨씬 빠르고 사실적이며, 제작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했습니다.
특히 젊은 지식인들은 서양식 정장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이를 문명화와 개화의 표식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결혼 기념사진, 돌사진, 졸업사진 등 인생의 중요한 의례적 순간을 기록하는 문화가 이 시기부터 점차 퍼져나갔습니다.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고 사회적 신분과 교양을 드러내는 근대적 문화 도구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사진은 단순히 개인의 초상을 기록하는 수단을 넘어, 근대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남기는 행위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는 근대적 자아의 증명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을 역사와 사회 속에 위치시키고,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근대적 사고와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사진첩을 꾸미거나 사진을 가보처럼 간직하는 풍습은 가족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개인과 가족의 모습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은 단순한 개인적 만족을 넘어, 사회적 연속성과 기억을 유지하는 문화적 행위였습니다.
특히 서구식 초상 사진은 시간을 붙잡고 기억을 영속화한다는 근대 사회의 가치관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사진을 통해 과거와 현재, 개인과 가족의 관계를 연결하고, 사회적 지위와 문명적 감각을 보여주며, 새로운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결국 사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근대적 사고와 문화를 상징하는 시각적 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전통 초상화는 대개 이상화된 얼굴을 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인물의 내면적 덕성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현실적인 외모보다는 권위와 품격을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화가는 피사체의 결점을 보완하고 이상적 이미지를 강조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인물의 덕성과 지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습니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록했습니다. 주름, 표정, 체형까지 모두 담아내는 사진의 사실성은 때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성 때문에 사진은 점차 현실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개인의 존재와 순간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며, 전통 초상화가 상징으로 처리했던 영역을 실재로 보여주는 새로운 매체가 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19세기 말 조선인에게 사진은 처음에는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낯선 기술과 초자연적 의미 때문에 두려움과 경계심이 컸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만에 사진은 열광과 동경의 상징으로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문화적 수용을 넘어,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조선인의 심리와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존재를 기록하고, 사회적 지위와 근대적 문명을 드러내며, 새로운 시대적 정체성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사상이 사회에 등장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일정한 패턴을 따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버렛 로저스(Everett Rogers)는 이를 혁신 확산 이론(Diffusion of Innovations) 으로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혁신은 한 번에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회 구성원은 각자의 태도와 심리적 특성에 따라 다섯 부류로 나뉩니다.
1. 혁신가(Innovators, 약 2.5%)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기술을 가장 먼저 시도하는 소수입니다. 이들은 호기심이 강하고, 때로는 모험심이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새로운 시도를 즐깁니다. 조선 말기에 외국인 선교사와 함께 사진을 찍거나, 개화 지식인으로서 서양식 정장을 입고 사진관을 찾았던 이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2.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s, 약 13.5%)
혁신가들보다는 신중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조선의 신문물에 관심이 많던 관료나 중산층 상인들이 초창기 사진관을 이용해 가문을 기록하거나 자신의 개화를 과시했던 사례가 여기에 속합니다.
3. 초기 다수(Early Majority, 약 34%)
대세가 어느 정도 형성된 시점에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위험을 피하면서도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사진관이 점차 대중화되고 졸업사진이나 결혼사진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이 단계의 수용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 후기 다수(Late Majority, 약 34%)
변화에 회의적이지만, 사회적 압력이나 필요성 때문에 뒤늦게 받아들이는 집단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 사진이 신분 증명이나 공식 기록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을 때 마지못해 사진을 찍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5. 지체자(Laggards, 약 16%)
끝까지 저항하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입니다. 미신적 세계관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이유로 사진을 끝내 거부한 이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일부 노인층은 평생 사진을 꺼리거나, 오히려 전통 초상화를 고집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이 조선 사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과 거부의 감정을 먼저 보였습니다. 낯선 기술이 자신의 신체와 영혼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 기존 세계관과 충돌하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새로운 환경과 기술에 점차 심리적 적응을 해 나갑니다. 초기에는 소수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먼저 사진을 경험하고 수용합니다. 그들의 행동과 경험이 사회적 증거로 작용하면서, 점차 대다수의 사람들도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동참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며 변화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됩니다.
사진을 처음 본 조선인의 공포, 이후 일부 계층의 열광적 수용,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이 보편적 심리적 패턴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문명이 등장할 때 인간 사회가 겪는 심리적 적응 과정은, 단순히 기술 확산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사회적 변화를 포괄하는 복합적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결코 과거 조선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특수한 현상이 아닙니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새로운 기술과 마주할 때 비슷한 두려움과 혼란을 경험합니다.
최근 얼굴과 음성을 정교하게 합성하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은 충격과 불쾌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실제와 거의 구분하기 어려운 만큼, 심리학에서 말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현상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무 진짜 같지만 어딘가 낯선 존재’가 인간에게 불안을 주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또한 Chat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이 불안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넘어,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과 존재 가치를 위협받는다는 깊은 두려움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도 “아이들의 뇌가 퇴화할 것이다”라는 우려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습니다. 불과 10여 년 만에 스마트폰은 삶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낯선 기술에 대한 전형적인 거부 반응이 뒤따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메타버스와 VR이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가짜 현실에 빠져 현실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은, 과거 사진 앞에서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두려워했던 조선인들의 불안을 떠올리게 합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19세기 조선 사람들은 사진기를 보고 영혼을 빼앗긴다고 믿었고, 21세기 우리는 인공지능과 메타버스를 보며 정체성과 현실을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다른 시대, 다른 기술이지만 인간의 심리적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두려움 → 호기심 → 수용 → 일상화로 이어지는 경로는, 기술 변화의 시대마다 반복되는 인간 본성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익숙해지고 적응하며,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사진을 무서워했고, 우리는 알고리즘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적응해간다.”
19세기 말 조선 사람들이 사진기를 보며 “영혼을 빼앗긴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을 두고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 침범당한다”는 불안을 호소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기술이지만 그 심리적 구조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낯선 대상에 대한 경계(neophobia)를 본능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화 과정에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형성된 생존 전략입니다. 조선인들에게 사진기는 “낯선 기계가 인간의 형상을 복제한다”는, 기존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에게 AI는 “비인간적 존재가 언어와 창작을 흉내 낸다”는, 익숙한 인간 능력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두 경우 모두 낯선 기술은 곧 위협으로 인식됩니다.
조선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모습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영혼과 생명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진은 곧 인간 존재의 일부를 훔쳐가는 위험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반대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이성적 사고와 창의성을 자신만의 특권으로 인식해왔습니다. 그런데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 우리의 자아상과 충돌이 일어나고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발생합니다.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흔들리는 순간, 불안과 거부감이 뒤따르는 것이지요.
조선인들이 “사진에서 손발이 잘리면 현실에서도 다친다”고 믿었던 것은 상징적 사고(symbolic thinking)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인간은 현실을 상징과 연결해 의미를 만들어내며, 이는 심리적 안정 장치 역할을 합니다. 현대인들의 AI 불안 역시 이와 유사합니다. “AI가 내 글을 대신 쓴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술적 대체를 넘어, ‘나라는 존재가 쓸모없어지는 것 아닐까’라는 상징적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즉, 기술은 곧 존재론적 불안을 자극하는 상징이 됩니다.
철학적으로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사진기는 “인간의 외모와 영혼”을 재현하면서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마찬가지로 AI는 “인간의 지성과 창의성”을 모방하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기준을 흔들고 있습니다. 결국 기술에 대한 두려움은, 기술 자체보다도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에 던지는 질문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조선인에게 사진은 “영혼을 빼앗는 기계”였고, 현대인에게 AI는 “인간성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공통적으로 인간은 새로운 기술 앞에서 존재의 안전망이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차이는 있습니다. 과거 사진기는 인간의 형상을 흔들었다면, 오늘날 AI는 인간의 지성을 흔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두려움의 뿌리는 같지만, 질문은 달라집니다.
“내 영혼은 안전한가?”에서 “나의 인간다움은 무엇인가?”로.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우리가 AI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기술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인지적·정서적 한계와 부딪칩니다. 낯선 기술 앞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습과 경험을 통해 그 경계를 조정해 나갑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적·윤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는 능동적 과정입니다.
19세기 조선 사람들이 사진기 앞에서 영혼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심리와, 오늘날 우리가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존재가 흔들릴까 불안해하는 심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질서를 위협하는 상징적 대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수용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의미를 해석하고, 기술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며, 그것을 새로운 문화와 질서로 변환하는 능동적 존재입니다. 사진이 결국 ‘영혼을 빼앗는 도구’에서 ‘기억을 남기는 장치’로 자리 잡았듯, AI 또한 단순한 위협을 넘어 인간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느냐입니다. 미래의 기술이 우리 삶에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통찰과 성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정한 적응은 단순히 익숙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술을 통해 인간성과 사회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말, 서울과 인천, 부산 등 개항장이 중심이 되어 사진관이 하나둘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아직 대중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사진관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체로 긴장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의자에 앉아도 손발을 덜덜 떨며,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기도 했습니다. 초상화는 화가가 붓으로 천천히 그려내는 것이었지만, 사진기는 “찰칵” 순간에 모든 것이 옮겨가니 그 속도 자체가 마치 혼이 빨려 들어가는 경험처럼 여겨졌던 것이죠.
당시 사진사들은 이런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방식을 동원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 출신 사진가들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얼굴을 그림처럼 기록하는 것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일부는 성경을 인용해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사진관 주인들은 손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바르게 앉도록 안내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촬영 안정성을 위해서였지만, 사람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앉아야 혼이 안전하다’고 이해하며 불안을 덜었습니다. 사진관에서는 종종 “사진은 붓으로 그리는 초상화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라고 홍보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걸어두는 영정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설명하면서, 오히려 효(孝)의 실천으로 연결시키려 했던 것이죠.
기념사진이라는 새로운 의미 부여하기 위해 결혼, 첫돌, 관직 임명 등 인생의 의례적 순간에 사진을 남기도록 유도했습니다. ‘중요한 순간을 기념한다’는 설명은 낯선 기술을 오히려 길조로 재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 일화들을 살펴보면, “머리카락 몇 올만 찍어 달라”며, 초창기 사진관에는 얼굴 전체가 찍히면 영혼이 빨려나갈까 두려워, 일부러 머리카락만 찍어달라고 요청한 이들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양반층 인사들 중 일부는 사진이 신분을 ‘낱낱이 드러내는 도구’라며 꺼렸습니다. 하지만 곧 사진이 서양식 근대 문명과 권위를 상징하게 되자, 오히려 앞다투어 사진관을 찾으며 초상화를 대체했습니다. 병으로 자식이 죽으면 마지막 모습이라도 남기고 싶어 사진관을 찾는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 사진관 주인은 아이를 단정히 눕히거나 앉혀 놓고 촬영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사진이 단순한 미신을 넘어 ‘영혼 기념물’로 이해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사진관은 단순히 낯선 기계를 들여놓은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과 경외, 상징과 적응이 교차하는 작은 문화적 무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