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다 Aug 04. 2021

구멍

잊을 수 없는 인연

 2004년 9월 15일 낮. 과외 수업을 마치고 핸드폰을 보니 시동생 이름이 떠 있었다. 시댁과 연을 끊은 지 5년째였다. 시동생이 전화할 일로 짚이는 게 없었다. 잠시 후 오는 전화를 냉랭히 받았다.

 “네.”

 “형수님. 엄마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계세요.”                    "네? 언제요?”

 “오늘 새벽에 일 나가시다가 집 앞 횡단보도에서 승용차에 치이셨어요.”

 “아! 많이 다치셨어요?”

 “네......”

 “어느 병원이에요?”

 

 대체 얼마나 다치신 걸까. 한양대 구리 병원을 가는 동안 보름 전에 뵈었던 어머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이 1996년 9월에 사업 부도로 타국행을 선택한 뒤 어머니의 8년은 장남 사모곡을 부르는 8년이었다. 아버님은 니 어머니가 날마다 국제전화를 하는 바람에 전화요금이 말이 아니라며 화를 내곤 하셨다. 그러면 어머님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들 목소리를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잠을 못 자겠다고 하셨다. 그렇건만 돈 생각에 아들 사는 나라에 못 다녀오시고 나나 애들에게만 아빠 보고 오라며 비행기표를 두 번 사서 주셨다. 비닐하우스로 새벽 일을 나가시어 버신 돈이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보고싶어 더는 못 참겠다시며 초등학생인 두 애를 의지하시어 8년 만에 아들을 만나고 오신 게 보름 전이었다. 그 날 공항 버스에서 내리시는 걸 맞아 구리 고기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을 때 어머님은 시종 벙글벙글하셨다. “내가 이제는 죽어도 눈을 감겠다.” 하시면서.


  한양대 구리병원 응급실의 자동 유리문이 열렸다. 응급실 앞 로비에 시누이와 시동생 부부, 두 분 작은아버님 어머님이 옹송거리며 서 있었다. 그들을 대하는 게 불편했지만 어머님 사정을 아는 게 급했다.

 “어디 계세요?”

 “아직 의식이 없으세요.”


 그 날부터 암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어머님은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지방에서 시어른들이 속속 올라오시고 자식들은 중환자실 가족 대기실에서 쪽잠을 잤다. 병원에서는 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면회는 하루에 두 번. 한 번에 세 명까지만.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에 캡을 쓰고 뒤가 트인 녹색 옷을 입었다. 중1 큰애와 5학년 작은애를 데리고 들어가서 입과 코에 대롱을 달고 깊은 잠에 빠져 계신 어머니를 내려다보노라면 속말이 들끓었다.

 ‘어머니, 현민이 현우 왔어요. 어서 일어나셔서 내 강아지 왔냐 하셔야죠. 어머니 이대로는 못 가세요. 현민 애비 효도도 받으시고 애들 장가가는 것도 보셔야죠. 제가 아직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길디긴 하루하루가 쌓였다. 시어른들은 어머니가 죽을 줄 알고 아들 보러 갔다온 거 같다며 쯧쯧거렸다. 시누이 둘은 면회하고 나오면 대성통곡을 했다. 점쟁이인 막내 시고모는 그들 등을 두드리며 니 엄마는 일어난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나는 어떤 날은 낮에 어떤 날은 저녁에 병원을 들렀다 집에 갔다. 그러다 추석을 이틀 앞두고 저녁에 전화가 왔다.

  “형수님. 어머니 운명하셨어요.“

 

  어머니는 시장에서 조화를 사오시는 분이셨다. 집 여기저기에 놓인 조화를 보고 큰시누이가 조잡스러우니 버리라고 하면 계면쩍게 웃으시며 조화만 보면 이뻐 죽겠다고 하셨다. 새벽에 비닐하우스 일을 나갔다가 저녁에 집에 가시면 부은 다리를 끌고 다니며 김치 담그고 아버님 와이셔츠를 주물러 빨고 방바닥을 훔치신 뒤 새벽에야 주무셨다. 큰애 작은애 산후조리를 꼬박 30일간 해 주시며 내 속옷을 빠시고 하루 다섯끼 밥상을 차려내셨는데 나는 그것이 민망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두 애들은 어머니에게 언제나 환영받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받았다. 1990년 12월에 고부간으로 만나 14년을 스미는 동안 어머님은 단 한 번도 나를 가르치신 적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라제.”로 받으셨다. 선생 며느리가 자랑스럽다시며 마늘을 절구에 찧어서 비닐에 넣어 얼려서 주시고 철철마다 김치를 담가 갖고 오셨다.


 그런 분을 나는, 그래봤자 시어머니라며 곁을 주지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추석 전 날, 아버지 생일이기도 한 그 날, 전을 부치면서 마음이 식었다.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여도, 이제 그만 하고 너를 길러 준 아버지한테 갔다오거라 하지는 않는구나. 어머님과 나는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기는 글렀구나. 체제 안에서 역할로 만날 수밖에 없겠구나하고 체념했다. 남편에게 날이 설 때면 아들을 그렇게 길러냈노라며 어머님을 원망했고, 남편이 떠나고 가장으로 두 애를 기르면서 고통스러울 때면 가해자로 보여 무례히 굴었다.

 

  남편이 없으니 중1짜리 큰 애가 상주가 되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오른팔에 삼베 띠를 두르고 머리에 삼베 두건을 쓰고 탈의실에서 나오는 큰애를 보는 순간 왈칵 울음이 터졌다. 큰애가 열네 살이 되도록 보이셨던 어머님의 다정함과 보살핌이 그대로 아픔이 되었다.

 ‘어머니, 이게 뭐예요? 현민이한테 왜 이런 옷을 입히세요?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그 날 제 집에 오셔서 현민 애비한테 같이 가자고 사정하실 때, 거길 갔다 오면 과외가 끊겨 먹고사는 게 위태로워져서 못 가니까 그렇게 아시라고 차갑게 말씀 드린 거, 어머님이 야속해서 그랬어요. 저보다는 아들 생각이 먼저니까 싫다는데도 집에까지 찾아오셔서 또 말씀하시는구나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님하고 같이 갔죠......그 날, 알았다고 힘없이 세아아파트 언덕을 내려가시던 어머니 그 쓸쓸했던 뒷모습. 이거 담고 저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시집 식구들은 목이 쉬도록 우는 나를 보며 수년간 며느리 노릇을 안 하던 이가 왜 저리 우나 했을 것이다. 장례 둘째날엔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가 와서 식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두 시누이가 영정 앞에 서려는 그에게 달려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울부짖으며 내 엄마 살려내라고 멱살을 잡았다. 지옥 같은 사흘이 지나고 해남 선산에 어머님을 묻고 집에 오니 어머님이 나 없을 때 두고 가신 참깨랑 고춧가루가 눈에 와 박혔다. 저걸 어찌 먹나. 저걸 먹어가며 어머님을 어떻게 이별하나. 기가 막혔다.

 

  나는 며느리가 있다.  어머님은 생전에 나를 며느리가 아닌 딸로 여긴다고 하셨지만 나는 며느리를 그리 여길 엄두를 못 낸다. 어머님은 나를 존중하셨고 아들이 선택한 길을 두고 내게 미안해하셨지만 나는 며느리가 내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간간이 못마땅해하며 아들이 힘들까봐 걱정한.


  이즈음에서야 나는 안다. 어머님이 며느리인 나를 자애로이 대하신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아들이 재기하지 못하자 마음 문을 닫아버린 며느리를 그렇게 섬기듯 대하신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 그 때 알았더라면 가신 뒤 생긴 구멍이 덜 컸겠다.

작가의 이전글 오죽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