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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다 Sep 01. 2021

빨간 책

편지글1

 지난 월요일 저녁에 가 전화해서 책을 사서 보내 줄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말이야, 무슨 책인지 궁금한 건 그 다음이었어. 우선은 부탁하는 게 책이어서 기쁘더라. 영창이 15일 떨어졌고 한 주 뒤 사당동으로 출발할 건데 보름간 영창에서 허락되는 건 독서뿐이고, 가져갈 수 있는 책이 다섯 권이니 네 권은 부대에다 갖다 놓은 책을 가져갈 거고, 한 권은 내가 사서 보내 주면 좋겠다 그랬지.


 그러게 부대에서 금지한 핸드폰을 왜 써서는 결국 이 사달이 나게 했느냐는 은 꿀꺽 삼키고 내가 물었지.  무슨 책이냐고.

 

  네가 말한 책을 듣고 나는 기뻤어. ‘다시, 연습이다’라는 책이고, 글렌 커츠라는 사람이 썼고, 겉 표지가 빨간 색이라고 하니 말야.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제목을 들으니 니가 '연습'을 다시 하려는 마음이 있나 보다, 기대가 됐어.


 통화 마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예스24에 들어가서 검색하고는 두 번째로 기뻤어. 저자가 너처럼 클래식기타를 전공한 사람이어서. 그가 기타를 놓았다가 다시 잡은 사람이어서. 먼길 돌아서 기타 앞에 다시 선 사람이어서 말이야.  희망이 생기더라. 가 하필 이 책을 이 지점에서 선택하다니!  가 다시 기타를 잡으려나, 설레더라고.


 어제 토요일. 오전 열 시부터 여섯 시까지 책을 읽었어. 빨간 책. 너한테 보내기 전에 내가 먼저 읽었어. 급히 읽었어.

 

 읽으면서 상상했어. 책 표지를 보며 기울어질 네 이마며 첫 장을 넘길 오른손 집게 손가락, 엇갈려 만날 무릎, 세워질 허리, 책의 어느 장, 어느 표현이 네 마음을 파고들까도 생각하고.


 오월 중순.  맑은 날의 하오. 소파 정면의 긴 창은 신록과 훈풍으로 꽉 차 있고, 오른쪽 네 방 사각 창은 붉은 단풍나무 긴팔들로 있었지. 평화로웠어. 


 나는 여기 있는데 너는 거기 있. 내가 오늘 여기서 읽 책을 이틀 뒤 너는 거기서 읽겠지. 지금 내가  멈추는 이 구절에서 너도 그럴까. 아프기도 설레기도 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나갔어. 책 여백에 내 생각 내 느낌을 적을까, 잠깐 생각했다가  세계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말았어. 그 대신 수첩에 메모했어. 영창 갔다 와서 월 둘째 주에 너와 만났을 때 얘기하고 싶은 대목을.

 

 지난 날들. 우리 그런 거 좀 했잖아. 나도 읽고 너도 읽은 책에서 나는 이랬는데 너는 어땠느냐고 내가 물으면 가 대답하고,  대답에 내가 감탄하면서 나보다 가 낫다고 너를 진심으로 추어올리는.


  이번 책은 그랬던 어떤 책보다도 기대가 돼.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저자인 글렌이 한 말 중에 마음에 드는 말이 있었니? 있다면 그게 뭐니?

 나는 “상상 속의 미(美)를 손에 넣고 싶다면 당신은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내가 내 욕망을 새 기술로 번역하는 한, 무용지물은 아니었다.”같은 말이 깊이 닿던데 너는 어떠니?

 글렌이 클래식기타라는 악기가 지닌 태생적 한계나 그것이 역사 속에서 천대받은 걸 얘기하면서 절망하던데, 너는 그것에 동의하니?     “내 악기가 저들의 악기(피아노나 바이올린)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기타에게 다들 왜 이러는 걸까.” 하는 말에 대해 나는 니가 반대 논리를 세워 주길 바라는데 실제 그러니?  

 글렌이 “이번 생으로는 부족하다.” “재능에도 계층이 있을까?” 하면서 고된 연습 끝에 탄식하는 대목에서는 어땠어?

 너도 유사한 이유로 기타를 등지려고 하는 거니?    글렌이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앨런 교수한테 레슨을 받는 장면이나 페페 로메로한테 마스터클래스를 받는 장면에서 혹시 유학 가서 그들에게 수업 받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니?

 글렌이 로드리고의 ‘기도와 춤’을 연습할 때 흐느껴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했는데 너도 그랬니?     타레가의 ‘카프리초 아라네’가 너도 연주한 곡이니?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이런저런 얘기를 좀 했지?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책들에 대해 얘기한 내용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때 감정들은 기억나. 내가 너랑 대등해진 느낌. 훈수 두려는 마음 없이 순전히 궁금한 마음. 내가 먼저 알고 혹한 세계를 너도 좋아한다고 할 때 온 짜릿함. 연대하여 이 생을 같이 헤쳐나갈 수 있을 거 같은 희망. 같은 곳을 여행한 사람끼리만 교환할 수 있는 은근한 행복감. 내가 만나는 세상을 해석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카드가 동일하다는 데서 오는 편안함. 그리고 모자지간으로서 그간 내 미숙함 때문에 너한테 상처 주고 피차 편안히 교류하지 못했던 시간들에서 회복된 행복감.

 

  모쪼록 이번 영창 생활이 니가 책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가 카투사로 군복무하게 돼서 으스대던 걸 생각하면 영창행이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가 영창의 동반자로 선택한 책이 하필 ‘다시, 연습이다’여서 나는 얼마나 기대가 되나 몰라. 알지, 수행이 따르지 않는 독서에 길은 없다는 걸. 읽을 때의 흥분뿐 원래 삶으로 되돌리는 책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이 책일랑 정녕 그렇지 않기를 기원하며 아까 낮에 형 편에 책을 보냈어. 부쳐 달라고.

  

  나는 내일부터 보름간은 괴롭겠지? 가 있는 공간이 수시로 떠올라서 내가 누리는 편안함이 미안해질 텐데, 그럴 때마다 그 책이 나한테 줬던 걸 너한테도 주겠거니 믿으면서 이겨낼까 해. 저 별을 님도 보고 있겠거니 하며 별리를 감당하는 연인들처럼. 보름 후에 만나. 글렌 커츠하고 같이.


 2017년 5월 21일 일요일 밤10시 40분에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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