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겨울. 서울에 살고 있던 나는 대학 4학년생으로서 가을부터 종일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일터는 동아출판사의 문학팀이었고 내가 하는 일은 소설 원고를 교정 보는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자양동에 있었고 동아출판사는 독산동에 있었다. 두 지점을 잇기 위해서 나는 아침 일곱 시 십 분쯤 집을 나와 57번 버스를 타고 2호선 전철 구의 역에 간 뒤 거기서 40여 분 전철을 타고 구로공단 역에서 내렸다. 구로공단 역에서부터 회사까지는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35분쯤 걸렸다. 나는, 어떻게든 문학팀 상사한테서 인정 받아야 한다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 날. 여느 날처럼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굵고 수많은 눈발들이 빠른 속도로 지상에 내리꽂혔다. 세상이 순식간에 아름다워졌다. 내 주위가 믿을 수 없이 하얘지고 있었다. 나는 결정했다. 쉬웠다. ‘안 갈래. 무단 결근?몰라. 안 갈래. 숨 막혀. 출근 카드에 찍히는 숫자. 정적 속에서 교정지 보고. 임시직으로나마 졸업 후에 남으려고 두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버스를 탔다. 구의 역 정류장에서 안 내렸다. 나는 내릴 곳을 정한 상태였다. 건대 앞이었다. 내가 가려는 곳은 건대 안 호수였다. 일감호.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그 대학의 부속고등학교여서 나는 그 호수를 잘 알았다. 계절별 얼굴, 날씨별 운치, 벤치별 전망, 특히 설경....나는 내가 아는 그 설국에 가고 싶었다.
건대 앞에서 내렸다. 눈발은계속 굵고 빨랐다. 나는 정문을 지나 호수까지 걸었다. 단호하게. 단정하게.
등나무 벤치로 갔다. 벤치를 등 뒤에 두고 섰다. 이 만여 평의 호수를 마주했다. 호수는 눈발로 꽉 차있었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여백 없이 하옜다. 또 고요했다. 소리는 들리는 게 아니라 보이는 거였다.
적막하고 경건했다. 눈은 영원할 것처럼 떨어져 내렸고, 떨어져서는 적멸했다. 유순한데 장중했다. 눈이, 제 자신 소멸할 줄 알면서도 하강하는 무언가로 보이자 슬픔 같기도 서러움 같기도 한 덩어리가 느껴졌다. 울음이 터졌다.
그 날 난 눈이 멎을 때까지 호수에 있다가 퇴근 시각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엄마와 아버지 낯빛이 여느 날과 달랐다. 쏟아진 말들은 그랬다. 출근 시각이 지나서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고, 두 분은 애가 제 시각에 집을 나섰으니 도착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답했고, 열 시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출판사에서는 서울 각 경찰서에 전화해서 내가 사고자 명단에 없는지를 한 시간 간격으로 물었고, 집에서는 엄마가 쌀을 팔아 점쟁이에게 가서 내가 무사한지를 묻고....
내가 호수를 오래오래 보며 깊은 슬픔으로 정화되며 새 힘을 얻고 있을 때 두 곳에서는 내 안위를 걱정하고 혹 소멸했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으니 그 날 그 호수를 잊지 못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