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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라 Jul 20. 2022

외로움에 대하여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읽고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을 읽었다. 네 명의 작가들이 질병과 돌봄에 대해 글을 썼다. 특히 그중에서 전희경의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이라는 글이 좋았다. 내가 스스로를 젊고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난 어릴 적부터는 아토피를 앓았고 고등학교 때에는 류머티즘 관절염을 진단받았다. 대학교 때 다시 아토피가 뒤집어졌고 직장 생활 중에는 원형탈모가 왔다. 2,3년 전부터는 다시 아토피와 류머티즘이 심해져 직장을 쉬기도 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질병마다 증상은 좋아졌다가 안 좋아졌다가를 반복한다. 어느 시기에는 괜찮다가 또 어느 시기에는 괜찮지 않다. 오래된 친구들은 요샌 좀 어떤지 묻기도 하고, 눈치를 살피며 묻지 않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건강 상태를 물으면 나는 "그냥 그래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 상태를 자세히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괜찮아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묻는 이가 내 상태에 뭐 그렇게 대단히 관심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상태가 안 좋다고 말하면 그들의 안쓰러운 표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기도 해서다.


  지난 글에서도 썼듯이, 고등학교 시절 류머티즘 전문 병원에 가면 모든 노인들이 환자들 중 단 한 명의 젊은 사람인 나를 죄다 쳐다보았었다. 그만큼 당시에는 젊은 자가면역 질환자가 드물었다. 아토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릴 적에는 아토피라고 하면 처음 들어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새는 너무나 흔해서 아토피가 있다고 말하면 너도 나도 아토피를 앓고 있는 본인이나 가족들 이야기를 한다. 아토피, 류머티즘, 원형 탈모는 모두 자가면역질환이다. 같은 질병의 사람들 숫자가 많아지니 내 외로움은 조금 줄어들었을까. 책에서 전희경이 말한 '젊고 아픈 사람의 외로움'에 깊은 공감이 갔다. 그리고 내가 엄마에게 느껴왔던 왜인지 모를 억울함이나 원망들이 그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되었다.


젊고 아픈 사람은 더 이상 '젊지 않다'. 하지만 늙은 것도 아니다. 이 애매함, 이 소속 없음이 만들어내는 외로움이 있다. (중략) 젊고 아픈 사람은 건강한 동년배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은 외로움, 목격자가 없고, 점점 더 없어지는 슬픔과 함께.
전희경,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中 185쪽




엄마에 대한 원망 - 나를 제대로 '돌봐' 주지 않았다는 외로움


  엄마는 토요일까지 일을 해야 하는 직장 여성이었다. 하루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고등학교 시절 관절에 원인 모를 통증을 가지고 나 홀로 이 병원 저 병원 치료를 받다가 결국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진단을 받게 될 때까지 엄마는 한 번도 병원에 같이 가 준 적이 없다. 내가 진단명을 말로 전달할 때에도 엄마의 오열이나 슬픔을 본 적이 없다. "아유, 왜 그렇지?"라고 말하며 내뱉는 한숨을 들어본 적은 있는 듯 하지만 속 시원하게 엄마의 마음을 본 적은 없다. 엄마의 속상함을 직접 보지 못해서인지 내 안에는 화가 쌓여있다. 부모라면 아빠도 같이 있는데 왜 난 엄마에게 특히나 화가 나는 걸까.


  전희경은 다른 글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에서 돌보는 주체를 가족이나 친구, 또는 요양보호사가 아닌 '시민적 돌봄'을 제안한다. 그녀가 소개한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에서는 '우리는 서로에게 몸을 (집단면역에서 알 수 있듯) 빚지고 있으며...(중략) 우리 몸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다.'라고 말한다. 전희경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짐, 기생적 존재, 이기적 집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취약한 몸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모두 아픔을 가지게 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그러면서 '가족 돌봄'이 아닌 '시민적 돌봄'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그녀의 제안에 따르면 나는 엄마를 원망해서는 안된다. 엄마의 돌봄 부족은 엄마의 탓이 아니다. 그리고 엄마는 나름대로 나의 돌봄에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사회적으로 시민적 돌봄을 받지 못해서 일 테다. 가족 돌봄이 부족했다고 느끼는 나의 외로움, 이것은 내 가족의 탓이 아니다.




질병을 가진 자 vs 건강한 자 사이의 외로움


  외로움을 느꼈던 시절을 지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결혼 생활 중에도 질병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증상이 심해지는 날마다 배우자에게 내가 아프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가 있기 전에는 서로에게 더욱 집중할 시간이나 여유가 있으니  쉽게 말했던  같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그에게 양육과 집안일에 나라는 짐까지 더하는  같아서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1/n으로 해내야 하는 일들이 매일 산더미인데  몫도 하지 못하고 아이를 '독박으로 돌봐야' 하는 일에서   명이 추가되었으니. 배우자가 집안일이나 양육을 잘하거나 못한다는 수준의 말이 아니다. 평생 해내야 하는 업무를 하나  얹은  같은 미안함. (물론 책에서는 모두가 취약한 존재이므로 서로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미안함과 더불어 외로운 마음은 무엇인가. 결혼을 할 때에는 서로를 거의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픈 후로는 나의 통증을 하나하나 그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한다고 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고, 설명하면 안쓰러워하는 것도 미안하다. 그러다 보면 말을 다 하지 못하게 된다. 내 처지, 내 상황, 내 통증에 대해 누군가와 백 퍼센트 공유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은 욕심일까.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서 외로운 마음이 드나 보다.




나만의 외로움 - 매미 소리


  통증과 함께 집에 홀로 있다 보면 자연에 집중하게 된다. 통증은 계속되지 않고 한 번씩 폭풍우처럼 지나가니까. 잠시 통증 휴식 시간이 오면 창 밖의 하늘, 매미 소리,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햇살, 조그맣게 지나가는 이름 모를 벌레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위로를 받는다. 자연을 생각하면 늙음과 병듦은 당연하다. 나도 자연의 일부구나, 너희가 살고 죽듯이 나도 살고 죽는구나, 이것은 나의 죄도 불행도 아니구나, 그냥 그저 일어난 일이구나 하고. 나 혼자만의 외로움은 갑자기 자연 속에 파묻혀 사라진다.  

 



늙어감 - 외로움을 넘어선 동질감


  나도 어느덧 사십 대가 되었다. 이젠 더 이상 주위 사람들에게 '늙어가니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등의 말을 해도 더 이상 '젊은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며' 타박을 받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도 서서히 노안이 오고 생리량이 줄어든다. 허리와 어깨가 아프고 조금만 무리를 해도 인대가 끊어지기도 한다. 좋아하던 커피나 술도 속 쓰림 때문에 끊을 수밖에 없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흰머리는 한 두 가닥들을 잘라내 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아졌다. 등과 어깨는 굽어가고 살은 쳐지고 뱃살은 늘어간다.


  이런 노화현상들은 참 서글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동질감도 느껴진다. 더 이상 나 혼자 '젊은 아픈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도, 주위 사람들도 같이 아파지고, 같이 늙어간다. 못된 마음일까. 주위 사람들 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천벌을 받을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의 외로움은 조금 줄어들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많은 위로를 준다. 아이를 돌보는 것도 공동육아를 할 때 훨씬 힘이 난다. 누군가를 간병하는 일도 고단함과 외로움을 나눌수록 쉬워진다. 나의 질병들도 비슷한 환자들이나 아니면 자연을 생각하면 낫다. 늙어가는 것도 같이 늙어가면서 들여다볼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 때 든든하다. 외로움을 넘어서는 시민적 돌봄으로의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꼭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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