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채널>을 플레이하고
스포일러주의
한 동안 책읽기도, 글쓰기도 하지 않았다. 게임만 약간 플레이하고 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대부분의 것들에 관심을 잃어버리고 축 쳐진 채 우울감만 곱씹었다. 돈이 없는 현재도 불안하고 장래가 없는 미래도 불안했다. 지금 살아가는 세계를 버리고 어딘가로 도망가버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멍하니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만 쳐다보며 억지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매달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우울했으니까.
그렇게 인터넷 서핑만 하며 시간을 그냥저냥 낭비하다, 옛날에 관심가졌던 미연시 게임 장르에 흥미가 생겼고, 거기서 이어져 옛날에 스팀에서 구입해뒀던 게임 크로스 채널이 떠올랐다. 뛰어난 시나리오로 미연시 오타쿠들 사이에서 명작으로 이름이 자자한 게임이었다. 그 이름값에 홀려 게임을 구매했다. 하지만 이해불가능한 프롤로그 파트만 클리어 한 뒤 몇 달 동안 게임을 키지 않았다. 이번에 생각난 김에 끝까지 플레이 해보기로 결심해고, 마침내 어젯밤에 엔딩을 보았다.
시험을 통해 적응계수가 높은, 다시 말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들만을 따로 모아놓은 군청 학원, 거기서 굉장히 높은 수치의 적응계수를 가진 주인공 쿠로스 타이치가 방송부 부원들과 함께한 여름합숙이 끝나고 산에서 내려오던 순간, 부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본인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일주일마다 새롭게 루프하는 세계에 갇혀버렸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쿠로스 타이치는 처음엔 이 사실을 몰랐다가 세계 내에서 유일하게 루프의 영향에서 벗어난 사당의 존재를 통해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문제있는 장면이나 대사가 검열된 스팀판으로 플레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2000년대 초반에 출시된 옛날 19금 미연시 게임이 원작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위가 높고 작품의 감성이 지금 세대와 맞지 않을 수 있다. 주인공 쿠로스 타이치는 걸핏하면 히로인들에게 저질스러운 성희롱을 던져대고 일부 잔혹한 장면들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공략을 보지 않으면 엔딩까지 도달하기까지 수없이 많음 루프를 견뎌내야 하기에 이부분은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게임이 마음에 든다. 정확히 말하면 이 게임의 이야기가 좋다. 단순한 연애감정만 쫓아가는 이야기가 아닌, 플레이어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 한 동안 우울감에 푹 절여 지내던 나에게 감동을 줄 만큼 이 게임의 이야기는 훌륭했다.
주인공 쿠로스 타이치는 어린 시절 겪은 비정상적인 학대의 경험으로 인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매우 삐뚤어진 본성을 소유한 인물이다. 평소엔 저질스런 성희롱이나 해대는 바보처럼 굴지만 그 속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이용하고 부숴버리는 잔인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히로인 중 한 명인 사쿠라 키리의 말대로 쿠로스 타이치는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는 괴물이다.
하지만 그런 본성을 갖춘 괴물임에도 동시에 다름 사람들처럼 평범한 인간으로서 타인과 교류하고 싶다는 매우 인간적인 마음 또한 지니고 있다. 작중에서 타이치가 주변 인물들에게 건네는 실없고 바보같은 농담과 행동들은 다른 사람과 통하고 싶다는 간절한 발버둥이다.
여러 이유들로 사이가 나빠진 방송부 부원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억지로 계획한 여름합숙이 실패로 끝나고 산을 내려오던 중, 차라리 아무도 없는 텅 빈 세계에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타이치는, 정말로 그가 바라던 아무도 없는 세계로 가기 전 동시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어렴풋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던 부원들을 바라보았고, 그로 인해 부원 전원이 루프하는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계속되는 루프에 지쳐버리지만 세계가 반복될 때마다 마주치는 이상한 소녀 나나카의 말에 깨달음을 얻고 사당과 자신의 특별한 눈을 통해 부원들을 차례대로 한 명씩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다. 마침내 혼자 남게 된 세상에서 홀로 보낸 지 일주일, 학교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할 만큼 정신이 망가져 버리지만 사당에서 아주 옛날, 자신이 아기였을 때, 엄마 나나카가 해준 말을 떠올린다.
미성년자인 나나카는 순간의 실수로 계획에 없던 아이를 낳게 되었다. 남편은 이미 죽었고, 자신 또한 목숨이 얼마남지 않은 시한부. 앞으로 부모 없이 혼자서 살아가야만 하는 타이치에게 나나카는 이렇게 말하고 포옹한다.
사랑해, 타이치. 무척, 무척 사랑해. 낳길 잘했다고 생각해. 만약 다시 태어나도, 또 낳아주고 싶을 정도야.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 타이치는, 자신의 괴물 같은 본성이 사라지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고 깨닫는다. 이후, 아무도 없는 세계 속에서 학교 옥상에 설치된 안테나를 통해 사람들이 존재하는 원래 세계를 상대로 방송을 전한다. 자살희망자가 들으면 자살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고 대신 희망이 생겨난다는 방송, 그 이름이 바로 크로스 채널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만족할 수 없다.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바로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것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엔 이유 없는 악의를 가진 사람이 넘쳐나고 그로 인해 상처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줄 타인을. 요즘처럼 전자매체가 발달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하고 연결이 가능한 시대에 더 깊은 의미를 가지는 주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글 역시 그런 마음에서 쓰여진 글이다. 홀로 남은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방송을 보내는 쿠로스 타이치처럼, 이 글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닿아 나름의 의미를 전해주길 바란다
여기는 군청 학원 방송부.
살아있는 사람,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