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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Aug 22. 2022

<30년간의 오독> 영화를 본다는 것

#0, 조금 늦게 쓰는 매거진 소개


“오독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오독이 가능하려면 정독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려는 일은 정답 풀이와는 다르다.” 영화를 글로 옮긴다는 무모하고 지난한 항로에 등대가 되어준 말이 있다면, 허문영 평론가가 슬쩍 건넨 한마디 조언이었다. …

송경원 - <강변호텔> 홍상수라는 세계를 읽고자 한다는 일(2019.04.17. 씨네 21) 中




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언제가 처음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해 300편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때는 영화를 보는 일에 정답이 있는 줄 알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바로 영화의 리뷰와 분석 글을 참고하며 내가 어디까지 정답을 맞혔는지 알아봤다. 마치 수능 공부를 하듯 정답을 맞히는 것에 몰두하고 그것이 영화를 바로 보는 방법이라 믿었다. 


어느 순간 회의감을 느꼈다. 영화는 너무 많았고 해석의 방향도 너무 다양했다. 영화라는 한 문제에 답이 여러 개인 경우도 많았다. 답이 여러 개라니. 어떤 시험이든 복수 정답이 난무하면 난리가 날 텐데 영화에선 그것이 흔한 일이었다. 어떤 영화의 정답은 내 생각과 잘 맞았고 어떤 영화의 정답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치기 어린 방어기제일까. 정답을 맞힌 영화를 좋은 영화라, 정답을 맞히지 못한 영화를 나쁜 영화라 치부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와 영화의 가능성을 스스로 깎아 먹고 있었다.


시험 보듯 영화를 보는 것에 지쳐 영화를 멀리 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것이 소비적으로 느껴지고 좋은 작품들이 불필요한 채점 과정과 함께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는데 정작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깊지 못했다. 그러다 본 허문영 평론가의 말 앞에서 마음이 섰다. "오독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오독이 가능하려면 정독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려는 일은 정답 풀이와는 다르다.”


나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오독의 상태에 있었다. 영화를 보는 방법에 대해 오판하고 기꺼이 평범해지고 있었다. 영화는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고,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시선들과 다양한 생각들 속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아니 단일하게 존재해서는 안 되는 정답만을 찾고 있었다. 영화에 보는 일에 오독은 없다지만, 그동안 내가 영화를 소비했던 방식은 명백한 오독의 과정이었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할 텐데, 나에게 그것은 '생산된 인식의 깊이'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이런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이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것이 아니라 '낳는'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신형철 -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글머리 中


더 이상 영화를 보기 전 리뷰를 찾아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검색하는 대신 내가 느낀 바를 사색으로 다듬는다. 미진하고 부정확하더라도 나름의 의미를 낳으려 하고, 그 의미를 말로 엮어내어 전달하고자 부단히 애쓴다. 덜 좋은 해석일지라도 온전한 나의 것이고 계속 나아질 것이며, 때론 틀린 부분이 있을 지라도 오독이라 부를 수는 없을 테니. 다만 더 좋은 해석을 하기 위해 나는 보고 읽고 곱씹고 나눈다. 작은 발자욱들이 자연스레 켜켜이 쌓여가듯이, 영화에서 포착해 낸 나의 의미들이 쌓여가도록.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나의 소고()도 정독과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나대로의 건설적인 오독을 계속하고자 한다. 그간의 과오를 반성하고 우매했던 과거의 습관을 파격(格)하기 위해 매거진의 이름을 <30년간의 오독>이라 했다. 이 매거진 안에서 영화를 보고 풀어내는 일에는 오독은 없다고 믿으며 단단히 걸어 나가되, 더 좋은 해석을 위해 나날이 깊어지기 위해. <30년간의 오독> 끝에 계속 나는 오독을 하려 보고 쓸 것이다. 조금 잘못 보더라도 약간은 놓치더라도 이 역시 오독이면서 오독이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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