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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Aug 20. 2022

<루비 스팍스> 오롯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12 조나단 데이턴, 루비 스팍스(2012)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캘빈(폴 다노)은 촉망받는 소설가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젬병인 남자다. 5년간 사귀었던 라일라와 헤어지고 집 안에 틀어박혀 글만 쓰던 캘빈은 어느 날 꿈에서 이상형의 여자를 보게 된다. 캘빈은 꿈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자신의 욕망을 반영해 자신과 꿈속의 여자인 루비(조 카잔)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밤새 소설 쓰기에 몰두하다가 일어난 캘빈은 다음날 아침, 캘빈의 상상이었던 루비가 자신의 집 주방에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루비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결국 루비가 허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캘빈은 루비와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루비와의 사랑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균열이 생기게 되고 캘빈은 현실의 루비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소설 속 루비를 계속 고쳐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설을 수정하고 수정해봐도 루비와의 관계는 자꾸만 어긋나고 결국 캘빈은 루비에게 소설의 존재와 루비의 실체를 털어놓는다.



사랑하는 그대가 내 맘과 같기를

<루비 스팍스>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소설 속 주인공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는 판타지에 기반해, 보편적인 연애의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의 이상형에게 첫눈에 반해 그 사람과 뜨겁게 사랑을 한다. 사랑은 점점 제 온도를 찾아가고 불길이 걷히자 안 보였던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점들이 입 안에 가시처럼 걸려 사랑은 점점 차게 식어가고, 사랑의 소화(火)가 상대방의 탓이라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우고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타인에 의한 변화는 결국 그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문제들로 계속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진다. 이런저런 발버둥에도 결국 그대는 내 맘 같을 수 없다.

루비(조 카잔)와 캘빈(폴 다노)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내 맘과 같아지는 것이 가능할까. 모든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우리가 기호로 활용하는 물건처럼 완벽히 나에게 커스터마이징 될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지점에서 서로가 어긋나는 것을 느낀다. 사랑에 눈이 멀어 서로를 바로 보지 못할 때 몰랐던 것들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캘빈이 소설을 고쳐 쓰는 것처럼 상대의 잘못된 점을 고치려고만 한다. 하나하나 상대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해도 사실 변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며,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다른 문제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어쩌면 불가능 일을 하다가 포기하는 것이 사랑의 과정인 걸까.



지금 이 순간, 그저 사랑하는 것

그렇다고 해서 <루비 스팍스>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하라'는 통속적인 격언을 전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하고 서로의 감정의 변화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면, 애초에 왜 우리는 사랑 안에서 괴로워하겠는가. 또한 영화 말미의 캘빈과 루비의 재회가 가능한 것은, 캘빈이 루비의 과거와 기억을 모두 지우고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전능한 판타지의 결과이므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붕괴가 예정된 사랑 앞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영화 말미에, 캘빈은 루비의 이야기를 소설로 출판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she came to me wholly herself, 
i was just lucky enough to be there to catch her"
그녀는 하나의 존재로 내게 왔고, 그녀를 붙잡은 나는 행운아였다.


상대를 만나고 사랑하고 단점을 발견하고 상대방을 내 맘과 같이 바꾸려 하고 결국 실패해 헤어지는 지루한 과정을 겪기에도, 그에 대해 고민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존재로 내게 와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순간 나에게 주어진 행운인 당신에게 집중하는 일뿐이다. 

"…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 주는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 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양귀자 -  <모순>(1998) 中

스쳐가지 않고 멈춰준 당신을 위해서 우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오롯한 당신을 사랑하는 단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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