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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과 관련된 트라우마 및 자살, 자해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읽기 전에 유의해주기 바랍니다.*
난 그들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다.
애초에 갖고 싶지도 않았다.
권성징악으로 언젠가 큰 상처가 생기든 말든 나는 그들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버겁다.
이걸 밝히기로 결심하는 데도, 이 모든 글을 쓰는 데도 한참 걸렸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내게 물어본다면 난 주저 없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조금이나마 누구나 볼 수 있는 이 공간에 그들의 악행을 기록해두고 싶었다고.
당시의 나는 아무 힘도 없었고, 그들에게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난 여전히 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 아이, 그 남자아이, A, B까지.
난 성인군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들을 평생 증오할 것이고,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날 악몽 그 자체로 살게끔 했던 이들은 두 다리 쭉 펴고 잘 것을 생각하니 억울했다.
그들은 나를 기억 못 할 테니까.
당장 성당에서 마주치며 보게 될 때마다 내가 공황으로 힘들게 했던 여자아이만 해도 그랬다.
걔는 6학년 때, B가 나중에 A를 데리고 들어간 여자애들 그룹에 있던 애였고,
B의 말에 나를 같이 싫어하는 기색을 대놓고 보이고, 무시하며
가끔 날 멋대로 취급하던 여자애들 몇몇 중 한 명 정도랄까.
딱 그 정도만 행했던 애였음에도 내게 그런 거부 반응이 나오게 했다.
정작 그 애는 그런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더 어린 시절과 나중이더라도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그들이 무얼 기억하겠는가.
photoghraph by Luie
반면에 난 현재 우울증, 공황장애, 그리고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
2019년부터니까 벌써 올해로 6년째다.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한창 뛰어노는 게 좋아야 할 초등학교 1학년 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어서 산 적이 없었고, 19년도에 처음으로 손목을 그었을 때부터
내 손목에는 피가 마를 새가 없었다.
목도 그어보고,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손으로 서툴게 오른쪽 손목도 그어봤다.
과거 2층 침대였던 내 침대의 한편에 밧줄을 사다가 두르고, 내 목에도 둘러 매달려 본 적도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미성년자로서 살 수 있었던 수면유도제를 새벽에 꾸역꾸역 삼키기도 했다.
80알을 한꺼번에 먹고, 처방받아왔던 약 한 달 치의 정신과 약까지 모두 털어 넣어
다음 날에 정신을 못 차리고 하루 종일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도 느껴야만 했다.
당연히 약을 복용한 건 그때가 마지막은 아니었다.
그 후로도 부모님이 아시는 건 한 번 더, 모르시는 건 두 번 더.
총 세 번을 더 그랬다.
가족들과 다 함께 사는 나는 성공률이 낮아 보인다는 걸 깨닫곤 금세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더더욱 양 손목의 피는 계속 흐를 수밖에 없었다.
난 손목을 그어서 피가 잔뜩 흐르게 한 다음, 항상 세면대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 그 안에 손목을 넣곤 했는데,
당연히 지혈이 되지 않고, 피가 더 많이 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몇 번은 씻을 때 칼을 들고 들어가 그은 뒤에 미리 받아둔 욕조에 몸을 담그며 손목을 푹 담그기도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모두 하나였다.
살고 싶은 마음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늘 무기력했고, 우울했으며 어떠한 응원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공감도 전혀 가지 않았다.
내 주위에 있는 가족들을 봐서라도 하루만 더 살아가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독증 증세까지 생겨버렸다.
유학을 위해 검정고시와 아이엘츠 시험공부를 해야 했지만 집중도 아예 못했고, 내내 멍하게 살뿐이었다.
그런 내게 가족들 때문에 의무적으로 끌려가다시피 갔던 정신과 의사는 몇 번이고 바꿨지만 항상 같은 말만 했다. 내가 문제여서 그런 일을 겪은 거라고, 그래서 나아지지 않는 거라고.
그럼에도 난 내보이는 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도.
내 모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꽁꽁 숨겼고, 난 더 파고들어 가며 아파했다.
그렇지만 난 내 아픔을 제대로 마주 보지도 않고, 당시에 의무라고 생각했던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떠났으니 당연히 더욱 병이 드는 건 당연했다.
얼마 지나지 못하고 난 울며불며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이모와 이모부가 내게 못해준 적은 절대 없었다.
이모부와는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런 거고,
이모는 내가 어려서부터 아주 사랑하던 존재였으니까 전혀 영향을 끼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럴 상태가 되지 못했는데, 난 이를 모른 척하며 떠났던 것이었다.
그러니 더 곪지 않을 수가 있나.
불행 중 다행으로 난 한국으로 돌아와 내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의사 선생님을 만났고, 심리 상담사 분도 만났다.
여전히 치료를 받고, 약도 복용 중이다.
몇 년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는 최근에는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약 복용량을 줄인 것.
아주 조금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조금은 기뻤다.
치료를 받던 초창기와 그 전의 나는 내 마음이 나아지지 않기를 바랐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도 뒤틀렸던 것 같다.
그러나 조금씩 차도를 보인 나는 어느덧 그것도 인정할 수 있는 단단함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정말 싫어하는 말들 중 하나라서 난 시간 때문에 나아진 것이라고 절대 생각 않는다.
내가 발버둥 치며 조금이나마 앞으로 가겠다고 살아온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스스로를 내던지고 싶을 때도 많고, 우울에 잠식당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죽지 않는 건, 글쎄.
여러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아직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용기가 부족한 건지, 아니면 진심은 살고 싶어서인 건지.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안정된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만, 하루씩만 더 살아가보자고 다짐한 것도 사실이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마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고통까지도 내 모습이고, 어쨌든 내가 겪은 것이니까 받아들이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용서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그 정도는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PS.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글을 쓴 나도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한 것처럼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의 상처가 더 쓰리냐를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난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길을 함께 걸어주는 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홀로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보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란히 걸어가면 덜 무서울 테니
우리 같이 내일 하루만 더 살아보자.
그걸 위해 앞서 말했듯 시간이 약이라서 누군가의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만큼 나아지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한 것이라는 걸 잊지 않고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당신이라는 것도.
오늘 하루를 살아낸 것만 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주 엄청난 쾌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