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미 성함은 그 시절 이름이 그러하듯 "아들이 많이 있을 것"이란 뜻으로 클태, 있을재, 사내 남을 쓰신다. 중학교 한문 수업에서 '친척들의 성함을 한자로 써보아요' 숙제가 있었는데, 외할미 성함이 제일 쉬었다.
하지만 외할미는 그리 많은 사내아이를 낳지는 않았다. 첫 아들을 낳고, 그 다음에는 딸 여섯을 낳으셨다. 첫 딸인 엄마를 낳으실 땐 '의외네' 하셨다는데, 그 다음 이모부터는 화도 내시고, 울기도 하시고, 속상해하시고, 바로 밭일을 나가기도 하셨다 들었다.
아들 아닌 여동생들을 낳으며 매번 속상해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엄마는 외할미를 다정히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고 부르셨다. 권력구도상 우리 엄마보다 입지가 좁아보이는 셋째부터 여섯째 이모들은 집요하게도 외할미에게 '딸 있으니까 좋지?', '딸 많으니까 좋지?', '우리랑 놀러오시니까 좋지?', '이번에 사온 예쁜 옷 입고 강천산 가자'며 엄마인 외할미를 불러대셨다. 결국 외할미가 80대 중반이 되었을 때, "그려, 딸도 한 명쯤 있어야 되는갑다"라며 생각의 대변혁을 인정하셨다.
외할미는 드라마에 나오는 츤데레의 미학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사촌들은 모이면 누가 외할미와 가장 오래 통화해봤는지 경험담을 나눈다. 외할미의 기본값은 45초.
"여보시요"
"할미, 나, 봉이모"
"하(응 으로 이해하면 됨), 밥 먹었냐"
"응"
"다 잘 있냐"
"그럼~ 할미는? 할미 식사허셨어?"
"하, 난 잘 먹고, 잘 있응게 올 생각말어"
"할미 보고싶은데?"
"뭐더러 보러와, 끊는다잉"-뚝.
여기서 통화를 길게 해보려면 이것저것 내용을 추가해야하는데, 외할미와의 통화는 숨쉴 공백도 없으니까 틈을 잘 노려야한다.
"할미, 할미, 장수에서 지진났대, 할미 괜찮아?"
"아~무렇지 않여"
"흔들리지 않았어?집에 계셨어?"
"응, 집에 있어 그렁가 하나 느껴진게 읎어, 끊는다잉"-뚝
외할미의 아흔번째 생신이 다가오면서 아들, 딸들은 외할미 집 근처 전주에 좋은 한옥 숙소를 잡았다. 금요일 저녁 식사도 좋은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손주들도 우리끼리 내려갈 팀을 짜고 돈을 모아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외할미 구순파티를 1주일 앞둔 주말, 외할미에게 전화했다.
"외할미, 거기 더워?"
"아 덥지~"
"서울도 말도 못하게 더워"
"여기도 겁나게 더워, 올 생각일랑 말어"
"외할미 집말고 전주서 봐, 주말에"
"오지말어~, 난 안갈겨, 더운데 뭐더러 오냐"
"뭘 맨날 오지말라그랴, 생신이니까 갈껴"
"난 안간당게"
"할미 생신인데 할미가 안와?"
"하, 하이간에 난 안가~"
"그러믄 우리 생신파티 안혀?"
"왜 안혀~너희끼리혀~, 난 안갈껴, 끊는다잉~!"
한참을 웃었다.
하도 하도 오지말라구 하시다가 이제 할미 생신에 당신이 안오신다는 거다. 그니까 파티를 해도 니네끼리 하란다. 우리 외할미 왜이리 웃기신지.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