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이혼가정, 열한 번째 이야기
우리 집은 결혼기념일을 챙길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기념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거나 기념할 만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하나가 없어지면 하나가 생겨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인데. 그렇게 새로운 충족 없이 결핍만 늘어가는 게 부모의 이혼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이혼기념일을 굳이 만들어 기억해보자면 20년 정도 전인 듯하다. 이제 나는 번듯한 직장도 다니고 돈도 번다. 그것보다도 그간의 외로움을 자세히 글로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20년 간 느꼈던 감정의 근원이 무엇일까, 찬찬히 생각해보면 부모의 이혼은 자식에게 곧
1. 더 이상 집=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2. ‘나’의 존재가 부정당한다.
1번은 비단 이혼가정의 문제라기 보다도, 화목하지 않은, 가정불화가 있는 모든 가정에 해당할 것이다. 다만 2번의 ‘존재 부정’과 비슷한 감정은 이혼이라는 큰 이벤트여야만 가져오는 정도의 것이리라.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근원에 대해 생각한다. 초등학생인 내가 ‘근원’이나 ‘존재’ 같은 단어를 곱씹을 리 없었겠지만, 아무리 어리더라도 무의식 중에 내재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생명-‘나’의 입장에선 ‘나’-은 부모의 사랑과 결합으로 태어난 존재다. 의도치 않게 잉태된 생명도 있다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만남과 역사로 만들어지는 데서 시작하니까.
그런데 그 결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끊어지는 일이면 결합의 산물인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미 만들어져 버려서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건가.
울어버리고 답을 내놓으라고 하고 싶지만 어린 시절의 나도, 그때의 나와 같은 입장에 놓인 지금 아이들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들 흔들리는 지금 나까지 울어버리면 안 되니까.
오래된 일이라고, 괜찮아졌다고 해도. 그렇게 몇 년 간 속으로 참아온 울음과 해결되지 못한 의문은 은 불안이나 미성숙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할 듯하다. 갑자기 찾아오는 행복을 의심해가면서.
매일 그렇지만, 눈이 오는 오늘은 유난히 앞으로 찾아갈 행복에 대한 의심 없이 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