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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세윤 Dec 24. 2021

나는 장례식장 예절을 모른다.

죽음에 익숙해진다는것-나는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에 익숙해지고 잘 알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감사하고 다행인 것과 동시에 철저히 부정하고 싶을 만큼 안타까운 일 이기도 하다.

     

 나는 장례식을 가본 적도 치러본 적도 없다. 다행히도 가까운 가족이나 친인척 분들 모두 건강히, 무탈하게 계시고 친구들이나 동료들의 비보에는 시기와 여건상 다른 이들을 통해 부조금과 못 가서 미안하다는 연락만 남기고는 하였다. 그래서 가끔 걱정이 되곤 한다. 혹여나 내가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장례절차와 예의에 대해서 실수나 무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죽음에 관한 소식들을 듣게 된다. 그 대상은 걸음도 못 뗀 유아들부터 흰머리 그득하신 노년분들까지 어김없지만 다양한 사정과 이유로 삶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 말이다. 어디선가 인간은 평균적으로 죽음보다 거미를 더 무서워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것은 아마 그 말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거미보다 멀리 있고 추상적인 두려움임을 나타내 주는 말인 것 같다. 혹은 너무 거대한 두려움이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다 롱 패딩이 뒷문에 끼어 사망한 20대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고 느낀 감정은 내 또래분의 횡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 가까이 있으면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또 동시에 너무 무서웠다. 나의 죽음은 (어쩌면 감사하게도) 내가 슬퍼할 수 없지만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해 본 적이 없는 내가 그 죽음을 감당해내고 다시 보통의 나날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가 말이다.

     

 나는 운전을 못 한다. 소위 말하는 장롱면허이다. 면허를 취득한 지 6년이 지났지만 운전을 안 하게 되니 못 하게 되고 또 못하니 안 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 그렇게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나의 어머니는 항상 말하시곤 한다.

      

“그거 아무나 다 하는 거 너라고 왜 못하겠냐”

      

 그러실 때면 나는 말하곤 한다. 대부분이, 혹은 모두가 한다고 그게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꽤나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감당하신 분들 역시도. 그래, 죽음을 극복해내는 것도 내게 그러할까 봐 겁이 난다.

     

 

 당장 포털 사이트에 ‘장례’만 검색해도 연관검색어 제일 상단에 뜨는 것이 ‘장례식장 예절’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장례 예법과 절차에 대해 신경 쓰고 궁금해한다. 나와 같이 죽음에 미숙한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인 것 같다. 아마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게 되면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지금보다는 훨씬 죽음에 익숙해질 것이며, 장례에도 꽤 익숙해질 것이다. 하지만(글쎄.. 지금이나 할 수 있는 어린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만약 상주라면 누군가가 장례절차에 미숙해서 예의가 없네 뭐네 하는 것보다는 그저 와주었다는 그 고마움 하나만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까?   

  

‘저 사람은 차라리 평생 미숙했으면 좋겠다’     


 장례 예의를 잘 알게 되고 장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사람의 소중한 사람을 보내주게 되었다는 말이니까.      


 당신은 죽음에 미숙한가? 나는 미숙하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겠지만 결코 겪지 않아 평생 미숙하고만 싶다. 그 누구의 죽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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