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와 수상 스키를 타다 막 떠오르는 해를 본 적 있나요? 바닷속에서 인어와 놀고 에베레스트를 산양처럼 훌쩍 오르고 커다란 나무 위 가지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과 차를 마셔 본 적 있나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상상이지요. 무료할 것 같은 오후 4시에는 차를 마시며 그런 상상을 하기 딱 좋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놀라운 상상력으로 이별의 슬픔 대신 행복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사랑 헨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살아요. 하지만 네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잠시 외출할 수 있답니다. 그사이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하는지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그림책 본문에서)
그녀는 홍차를 마시는 오후 네 시를 매일 기다립니다. 그건 먼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사는 남편 헨리와의 비밀스러운 약속 때문이지요. 그녀가 차를 마시며 눈을 감고 있으면 사람들은 낮잠을 자는 줄 알지만 사실은 헨리와 하늘을 날며 모험을 떠나지요. 사자와 뛰어놀고 공룡을 타고 스핑크스와 수다를 떨고 유니콘을 타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구경합니다. 또 때로는 나가 놀지 않고 구름 위에 앉아 헨리의 어깨에 기대어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글썽이는 미소를 짓지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납시다. 이번에는 달로 소풍이나 갈까요?”(그림책본문에서)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되어 갑니다. 구름 위에서 천사가 시계를 보고 헨리와 그녀는 내일을 약속하며 아쉬운 입맞춤을 합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깊은 슬픔과 그리움의 시간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슬픔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시 만날 그날을 그리며 위로를 전하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주디스 커 글. 그림/웅진 주니어>입니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는 영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주디스 커가 54년을 함께했던 남편 톰과 사별을 하고 지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006년 남편 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주디스 커는 큰 충격으로 1년 동안 드로잉조차 하지 못하다가 생전 톰의 모습을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리고 비로소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천국에서 남편과의 만남을 상상하며 만든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는 모든 이별을 주제로 한 그림책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주디스 커가 80대와 90대 나이의 전성기에 냈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노년의 주디스와 톰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앞표지와 그림은 색연필과 크레용으로 채색되어 더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그림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연두 빛 숲 높은 나무에 올라 그녀와 헨리가 여러 동물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그림입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작가의 첫 작품 <간식 먹으러 온 호랑이>의 호랑이가 예전 그림책에서처럼 티팟을 통째로 들고 마시며 깜짝 등장하는데 작가의 따뜻한 유머가 곳곳에 숨어있고 천국을 보듯 평화롭습니다. 또 헨리와 구름 위에 앉아 옛일을 회상하는 그림은 나의 인생 여정의 기억들과도 겹쳐져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합니다.
주디스 커의 그림책에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등장합니다. 노년에 작가 옆을 지키며 상상력을 더해주었던 고양이는 친구 같기도 하고 자식 같기도 합니다. 이번 그림책에서도 역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비밀을 그녀와 함께 공유하는 하얀 고양이가 나오고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과 소통하며 꿈속까지도 따라다니지요.
2019년 5월 주디스 커가 작고한 날 나는 무척 놀라고 슬펐습니다. 90세가 넘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 온 그녀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동물에 대한 애정과 독자들에게 주는 위로와 상상력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닮고 싶고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였습니다. 이제 그녀의 소식도 그림책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습니다.
지금 주디스 커는 천국에서 남편 톰을 만나 자유롭게 어디든 날아다니며 행복하겠지요. 나는 햇빛이 엷어져가는 오후 4시가 되면 차를 마시며 그녀를 생각합니다. 아픔 없는 곳에서 여러 동물들과 그녀가 사랑했던 고양이들과 매일매일 티타임을 즐기며 까르르 웃고 떠드는 소리를 상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