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막을 먹으러 친구와 이태원에 놀러갔다. 방송에 노출된 맛집이라 그런지 대기줄이 있었다. 하염 없이 기다리는 중에 눈길을 끄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가방 속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채로 통창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반려인과 등을 마주 대고 앉아 있었다. 강아지가 출입할 수 없는 음식점이라 어쩔 수 없이 떠올린 반려인의 비책인 듯 했다. 강아지는 제법 의젓하게 반려인을 기다렸으나 시간이 흐르자 가방에서 탈출하여 가게 입구에 철퍼덕 앉은 채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고대했다. 비어 있는 가방을 알아차린 반려인이 가게 밖으로 나와 강아지를 달래고 가방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자 강아지는 그 어떤 낑낑댐도 없이 순순히 가방 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려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강아지는 다시 가방에서 탈출하여 가게 입구에 시위하듯 앉아 있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반려인은 카이막의 맛을 느낄 새도 없이 거의 마셔버리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어른들이 문제의 강아지(?)를 보고 말 그대로 난리가 나셨다. 살아 있는 강아지인가, 홍보용 인형인가 열띤 토론부터 인증샷 열풍, 그리고 대뜸 "메~리야."를 연호하며 다가오시는 분까지. 나는 그중에서도 강아지를 계속 '메~리'라고 부르시는 아주머니가 너무 웃기고 좋았다. (아주머니는 모르셨겠지만 주인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었던 바, 강아지의 진짜 이름은 망고였다.) 아주머니에게 강아지는 곧 '메~리'라는 공식이 있어 보였는데, 그 전형성마저 좋았다. 마치 길고양이를 발견하면 "나비야~"라고 다정히 부르듯이. 이름 모를 강아지를 발견하고 "어이, 강아지!"라고 호명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드물지 않나. 메리든 해피든 어떤 이름을 불러주었다는게, 그냥 지나가는 강아지가 아니라 이름을 지닌 어떤 존재로 바라본다는게 참 다정했다.
올해 나는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주짓수는 내가 지금까지 연마하던 킥복싱에 비해 신체 접촉의 빈도도 높고 신체 접촉의 범위도 매우 넓다. 그러다보니 주짓수 스파링을 하는 회원들과 이렇다할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어도 주기적으로 얼싸안다보니 괜히 내적 친밀감을 쌓게 된다. 그러던 중 나와 자주 스파링을 하던 한 회원분이 운동도 같이 하는데 여태 이름도 몰랐다고, 이름이 뭐냐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지막히 이름을 불러본 순간부터 나는 왠지 그 언니를 좋아하게 된 것만 같았다. 익명의 어떤 회원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나는 이름을 부르는 것의 다정함이 좋다. 학창시절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과 '야', '너', '학생' 등으로 부르는 선생님에게서 받았던 느낌이 다르지 않나? 내 이름을 아는 것을 나를 아는 것이라 결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이 내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어린 시절의 나는 참 뿌듯했고, 선생님 앞에서만큼은 더 의젓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름을 가진 대상의 존재감이 남달라서다. 기실 모든 존재는 이름이 있지만, 많고 많은 호칭 중에서도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은, '나는 너라는 고유한 존재를 알아차렸고, 나는 이만큼이나 너에게 관심이 있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가 아는 존재들의 이름을 마구마구 불러줄테다. 이름을 모르는 존재들의 이름을 열심히 물어볼테다. 내가 할 수 있는 사소한 다정함으로 세계를 바라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