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생경한 장면을 목격했다. 도보 옆 울타리 아래로 아파트 단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아파트 구석 저만치 서서 몰래 담배 피우는 중년 여성의 뒷모습을. 입은 옷이나 하고 있는 머리스타일이 영락 없이 푸근한 아줌마의 그것이었는데 구석에서 맛깔나게 흡연 중인 (아마도) 아줌마라니 너무 낯설었고, 동시에 이런 장면에 낯섦을 느끼는 내가 더 낯설었다. 나는 왜 낯섦을 느끼는가?
사실 나는 젊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익숙한 편이다. 흡연 기간이 어느덧 20년을 바라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자연스레 찾아오는 담타(담배 타임)에 길들여진데다가 그 친구는 흡연 매너가 좋아서 길바닥에 침을 뱉거나 공공장소에서 간접 흡연을 시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담배란 개인의 기호 식품이라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기호 식품을 즐기고 계신 아줌마를 보고 화들짝 놀랐을까.
그러고 보니 이곳 저곳에서 비슷한 분들이 많이 목격되었다. 음식점 옆 골목에서 앞치마를 맨 채로, 기다리는 남편 옆에서 쓰레기 봉투를 든 채로, 술집 앞에서 지친 표정으로 담배 피우는 여자들. 이들을 보고 놀란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누군가의 엄마일거란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나이 든 중년의 여성을 당연히 누군가의 엄마일거라 지레짐작하는 것, 그리고 엄마라면 가족을 위해 담배와 같이 해로운 기호 식품을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던 것이야말로 뼛속 깊은 편견의 산물인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특히나 더 부끄러웠던 이유는 대학 시절, 김형경의 소설인 <담배 피우는 여자>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김형경의 소설 속에서 옆집 여자는 남편 몰래 담배 피우는 여자다. 옆집 여자는 담배를 도무지 끊지 못하는 아내에게 가하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옆집 베란다로 뛰어 넘어올 만큼, 그리고 담배를 끊었다고 거짓말하고 남편의 곁으로 돌아갈 만큼 남편도, 담배도 모두 사랑하는 여자다. 옆집 여자를 지켜보는 '나'는 인류가 그토록 오래 담배를 피워 온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다시 이 세상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위태로움 때문에 더 깊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담배 연기는 저토록 희미하고 나약한 끈으로라도 저를 이 베란다에 묶어주는 최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두 여자가 자신이 끊임 없이 착취 당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가정 주부로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규범에 반항하고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는 수단으로서 담배를 피운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내가 목격한 중년의 여자들은 비혼 여성일 수도 있고 기혼 여성일 수도 있다. 그들 중에는 자식의 엄마도 있을 테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정체성과 상관 없이 그녀들은 각자의 이유로 담배를 피울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한 켠에 대해서 당황하는 나의 마음은 사실 나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조금 실례처럼 여겨졌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조금 더 나은 삶-내가 잘 먹고 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덜 상처 주고 더 사랑 주는 삶이면 좋겠다.-을 살기 위한 방법에 대한 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은연 중에 갖고 있던 편견이나 오해를 풀어내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는 사람처럼 살아내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재사회화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또 담배 피우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조르르 달려가 담뱃불을 댕겨 드릴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당황한 눈빛을 던지기보다 건전한 무관심을 표현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