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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말함 Aug 13. 2022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소개팅남 : 혹시 무슨 운동하세요?

소개팅녀 : 아, 저는 킥복싱과 주짓수를 배워요.

 

   여기서 소개팅녀는 나다. 여리여리한 원피스를 입고서 킥복싱과 주짓수를 배운다며 수줍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솔직히 짜릿하다. 격투 종목을 배운다고 해서 소개팅남이 나를 무서워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소개팅남은 나를 함부로 대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나는 데이트 폭력을 겪고 이별을 결심했다. 이별을 결심한 직후 만큼 무서운 시간이 없었다. 내가 상상력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상대가 했던 비상식적인 언행을 근거로 삼는다면 헤어진 이후에 집 앞에 찾아와 해코지를 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충분히 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안전 이별에 성공한 이후 나는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인어공주가 되겠다는 꿈을 잠시 포기하고 수영장 대신 체육관에 나갔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패버리겠다'가 목표는 아니었고 신체를 강하게 단련한 여자(그래서 함부로 했다간 제대로 역관광을 시켜 줄 여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고 싶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인해 체육관이 영업 중지 상태였을 때를 제외하곤 나는 벌써 3년간 매일 체육관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다. 방어 이상의 전투력을 갖추고자 고군분투한 것은 아니었으나 타고난 성실성을 어쩌지 못해 매일 체육관에 들른 나머지 정확한 자세와 강력한 파워, 날랜 몸동작을 겸비하여 관장님으로부터 대회 나갈 생각 없냐는 권유를 계속 받고 고등학교 남학생 정도는 이제 무조건 이긴다는 소리를 매번 듣는다. 그러다보니 나도 욕심이 생기더라. 나보다 덜 다닌 관원들과 스파링을 할 때면 무조건 이기고 싶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고 혹시라도 그들에게 한 대라도 맞을라치면 혹은 제대로 맞으면 기분이 너무 나쁜 거다. 올해 들어 시작한 주짓수도 마찬가지다. 팔다리가 길고 금방 배워서 타고난 주짓수 인재라는 칭찬을 자꾸 듣다보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주짓수도 편히 즐기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다보니 체육관에 가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잘 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체육관에 가는 것이 피곤한 일이 되어 버렸다.   

 

 "야, 매일 하는 건데 어떻게 매일 잘하니? 이틀 잘하고 이틀 별로고 하루 평타 치는 거야. 그러면 돼. 근데 솔직히 우린 그것보다 낫잖아. 잘하고 있어." -장수연,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라디오 PD인 장수연 작가의 책에서 발견한 구절이다. 라디오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방송을 송출한다. 매일 취미로 하는 운동도 이토록 힘겨울진대 똑같은 '일'을 매일 하자니 아마도 매일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 그런 그녀에게 연출 선배가 한 말은 매일 같은 일을 잘 해내고 싶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아포리즘이다.   

 

 "누굴 이기려는 마음 대신 슬렁슬렁 해야 오래 할 수가 있어."

 누굴 이기려는 마음. 내가 운동을 하는 동력은 그것이었을까? 그래서 마음대로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지는 기분이 들었을까? 아무도 나와 승부를 겨룬 적이 없는데 멋대로 우월감에 도취되고 때론 또 열패감에 시달린다면, 그건 건강한 동력이 아니라 비뚤어진 호승심일 것이다. 시어도어 다이먼의 <배우는 법을 배우기>(민들레, 2017)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동작을 익히거나 음계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부적절한 반응과 감정, 태도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다시 말해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배우는 것..." 내가 자유로워져야 하는 부적절한 태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기고 지는 걸 떠나는 법, 잘하지 못하는 채로도 계속 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황선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나는 킥복싱과 주짓수가 재미있고 이것을 배우는 내가 꽤 멋지다고 생각한다. (지불한 돈이 있어) 앞으로도 즐겁게 체육관에 다니고 싶은 나는 매일 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기로 한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넉넉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대회에 나갈 것도, 선수가 될 것도 아니기에 누군가보다 잘하지 못해도 그냥(잘할 필요 없음, 이길 필요 없음, 할 수 있는 시간 있음, 할 수 있는 건강 있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감사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리려고 한다. 그래서 이 지겨운 반복을 앞으로도 열렬히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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