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따뜻한 기억
특별한 날이 있다. 매년마다 돌아오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날은 일주일 전부터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생일에 대한 태도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에게 생일이 더 특별한 이유는 소중한 사람들의 축하 메시지에서 전해지는 마음들이 유난히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인 것 같다.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일 축하는 나에게 다른 의미로 또 특별한데, 생일을 맞이한 사람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시간 동안 그 사람이 기뻐할 것이 상상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함께 설레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특별한 날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메시지들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그날은 설레는 내 생일인 것 마냥 소중한 사람의 생일이었다. 그런 특별한 날의 하루 시작과 끝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그렇게 나는 일주일 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물은 어떻게 서든 그 사람의 취향을 생각해서 골랐지만, 특별한 저녁 식사를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식당 예약부터가 전쟁이었는데, 예약 경쟁이 심해서라기 보다는 워낙 레스토랑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고, 맛, 분위기, 서비스, 가격 등등 다양한 면에서 각자의 강점이 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고,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집착하리만큼 분석을 많이 해서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도 몇 개의 후보가 추려졌는데, 그 첫 번째가 Raoul's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생일 식사의 핵심은 맛도 맛이지만, private 한 공간에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늑한 공간이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라기보다 사실은, 높은 평점과 진짜 '예약 전쟁'이 이 레스토랑을 더 탐하게 했던 것 같다.
결국은 그 전쟁에서 실패한 자로서 다음을 기약하게 되어 버렸긴 하지만.
그래서 다시 시작한 레스토랑 헌팅에서 걸린 곳이 바로 로베르트 (Robert)였다. 이곳은 예전에 한 친구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 저장한 곳이기도 했지만, 내 옛 추억이 담겨있는 '콜럼버스 서클'에 위치해 있어서 더 기억이 선명했다. 맨해튼 59번가 브로드웨이 에비뉴에 위치한 콜럼버스 서클 (Columbus Circle)은 빼곡한 빌딩 숲 사이에 넓은 광장처럼 뚫린 동그란 타원형의 로터리로, 높게 솟은 콜럼버스의 기념비를 중심으로 차들이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꽤나 멋진 곳이다. 원래 이곳을 '더 서클'이라고 불렸다가, 나중에는 '그랑 서클'이라고 불렸고, 콜럼버스 기념비가 세워진 이후에는 오늘날의 '콜럼버스 서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센트럴파크(Central Park)'가 있고, 아래쪽은 큰 쇼핑 단지인 '타임워너센터(Time Warner Center)'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추억과 기억이 서려 있는 장소는 사실 그 둘의 사이인 '트럼프 호텔' 1층의 '장조지 (Jean Georges)' 레스토랑이다. 미쉘린 2 스타인 장조지 레스토랑에서 풋내기 쿡 (cook)으로서의 3개월간의 시간은 말 그대로 눈물과 땀으로 기억되는데, 첫 직장이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게 참 웃길 일이지만, 그래서 그만큼 많이 깨진 시간이었다 (당시의 이런 나를 받아준 레스토랑도 참 고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비스에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던 셰프들의 프로페셔널함에 또 한 번 감사하다). 그때 타임워너 센터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매일 출근 전 콧물을 훌쩍이면서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찬양을 들으며 기도했던 눈물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참말로 위로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지나간 것에 대한 감사와 추억의 시간으로 돌릴 수 있게 되어서 특별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장조지도 아니고, 내가 요리하는 것도 아니고, 로베르트에서 밥 먹으러!
구글 리뷰 사전 조사를 통해 이곳은 창가 바로 옆에 앉지 않은 한, 올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일주일 전에 미리 예약과 함께 "소중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합니다. 창가 옆 가장 좋은 자리를 남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센스 있는 메모를 남겨 놓았다.
(*TIP: 레스토랑 예약할 때 '생일'을 언급하면 특별한 이벤트를 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메모를 잘 받아주셔서 우리는 가장 좋은 창가 옆 자리에 생일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은 역시 '코스 요리'와 '플레이티드 디쉬'지? 요즘에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도 알라 카르트(à la carte: 코스 말고, 단품으로 시키는 메뉴 리스팅)가 잘 되어 있어서 코스로 시킬 필요는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로 시작과 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코스 시작 전: 아뮤즈 부쉬 <토마토 수프>
코스 요리의 첫 번째 음식은 '주문하지 않은' 한 입 크기의 애피타이저 아뮤즈 부쉬 (amuse-bouche)였다. 프랑스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입을 즐겁게 하는 것'쯤으로 해석되는데, 코스가 시작되기 전 손님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의 의미로 기분 좋은 식사의 시작을 유도한다. 때때로 레스토랑에 대한 첫인상이 될 수 있어 고급 레스토랑 셰프들은 아뮤제 부쉬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받은 아뮤즈 부쉬는 아주 간단한 토마토 수프였는데, 사실 딱히 맛에 있어서 큰 감동은 없었다. 그래도 공짜로 먹는 작은 선물이 썩 나쁘지 않았다.
코스 1 콜드 애피타이저 <무화과 비트 샐러드>
첫 번째 코스는 무화과 비트 샐러드. 사실 멋진 이름과 소제목이 분명 있었는데 메뉴 사진을 깜빡하는 바람에 이 샐러드의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다. 비트는 사실 '달콤한 맛이 나는 붉은/노랑 무'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생으로 썰어 먹거나 주스로 갈아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스팀으로 익혀 먹는 경우가 더 많다. 익으면 당연히 아삭함이 사라지고, 익힌 무의 식감이 나서 샐러드 같이 찬 음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단맛이 오히려 진해져 익힌 비트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이 샐러드는 시큼하지만 무르고 부드러운 식감과 맛이 밸런스를 맞춘 샐러드가 아닐까. 시큼/아삭한 재료들 (오이, 사워 드레싱, 청포도, 라디끼오), 부드러운 재료들 (비트, 리코타 치즈) 그리고 그 어떤 중간 지점의 무화과까지 맛과 질감의 그러데이션을 잘 활용한 것 같다.
다양한 식재료를 한 접시에 넣을 때는 처음부터 섞어서 넣느냐, 아니면 따로 준비해서 배치만 같이 하느냐에 따라서도 엄청난 차이를 주는데, 플레이팅의 의도 있는 배치가 그래서 참 중요하다.
와인 졸인 듯한 소스를 흩날리듯 네 번 그은 줄은 텅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린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또 한 면에 샐러드를 몰아넣었지만, 메인인 '무화과'의 존재가 부각이 되도록 나머지 재료를 다 섞은 뒤 퀴노아가 묻지 않은 무화과를 따로 떼어 올렸다. 플레이팅에서의 핵심은 메인을 부각하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나머지 조연출들을 어떻게 배치하는가인데, 거기에 배치된 음식을 한 번에 먹었을 때 쌓아지는 맛의 레이어들까지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일 축하의 자리에서 당연히 장황하게 설명을 늘여놓지는 않았지만, 기대하지 않은 애피타이저의 플레이팅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나 보다.
코스 2 메인: 리가토니 & 필레미뇽
두 번째 코스로 등장한 메인은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리가토니(Rigatoni: 튜브 모양의 파스타 이름) 파스타와 필레 미뇽 (fillet mignon)이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기에 맛있는 맛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 날의 생일자는 토마토소스를 유난히 좋아해서 파스타는 항상 토마토로만 시키는데, 로베르토의 리가토니가 입에 맞았는지 잘 먹어 주었다.
필레 미뇽은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소고기 안심 부위인데, 역시 클래식하게 스테이크에 함께 따라오는 클리셰들 (아스파라거스, 포테이토, 크렘프레쉬, 붉은 와인 소스)이 등장한 무난한 플레이팅이었다. 포테이토의 경우 프렌치프라이, 매쉬드 포테이토, 오븐 감자 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오지만, 로베르트는 특이하게 파베(Pavé)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얇게 자른 감자를 겹겹이 쌓아 오븐에 구운점이 '조금 더' 특별했다. 레이어마다의 크리스피 함이 쌓이면, 한 입 먹을 때 뭔가 더 특별함이 가득 씹힌다.
디저트: oh no! 기억나지 않는 그 이름
코스 요리의 장점(?)이라면 시간 차를 두기 때문에 더 빨리 배부르다는 점이다. 일단 샐러드를 비울 때부터 슬슬 배가 찼는데, 메인 두 접시를 힘겹게 비우고 난 뒤에 더 이상 디저트 생각이 나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디저트는 바로 스킵했겠지만, 생일 케이크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고 '생일 축하해'라는 메시지를 적은 스몰 디저트가 혹시나 안 나올까 봐, 여전히 배가 안찬 척 부족한 연기를 하며 디저트면을 탐색했다.
그래서 사실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특별한 식사를 위한 '분위기 플레이팅(?)' 목적으로 '디저트 1'의 조연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쏘리.
서프라이즈하고 싶어서 웨이터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도 귀여운 초가 나와서 참 특별히 감사했다. 생일 축하가 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메인인 초를 중심으로 디저트들이 잘 '플레이팅'이 된 것 같다. 물론 어둑해진 저녁 하늘도 한 몫했지만.
특별한 식사는 그렇게 잘 마무리되었다.
특별한 날 먹는 식사에서 사실 중요한 건 얼마나 비싼 음식을 먹었느냐, 얼마나 맛이 훌륭하냐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의도와 계획 하에 레스토랑과 메뉴를 선택한 식사였지만, 그날 이후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날을 계획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기뻐했는 지를 마음으로 느껴지는 그 특별함 뿐이었다. 비록 의도된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음식들은 기억 속에 결국 조연이 되어버렸지만, 특별한 추억은 메인이 되어 메시지가 잘 전달된 특별히 감사한 하루였다.
이제 '콜럼버스 서클'를 생각하면 나에게 특별히 감사한 곳으로 기억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