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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Dec 09. 2021

오직 네가 중요하단 말이다.

첫사랑을 만난다면(30_소설)

“다 왔다. 다녀와, 밑에서 기다릴게.”

“왜, 같이 들어가지 그래?” 



“아냐, 그냥 밖에 있을게.”

“같이 가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단 말이야.” 계속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를 끌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넓은 병원 구석에 앉아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물을 마시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의 행동이 좀 이상했지만, 내 이름이 호명되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 학생, 오늘은 허리 치료하러 온 게 아니네요? 발목은 어쩌다 다쳤어요?”

“어제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어요. 걸을 때마다 지끈거려요.”



“어디 한 번 봅시다. 신발이랑 양말 벗고 여기 다리 올려봐요.” 내 다리를 보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을 이었다.


“요즘 자전거 타다 넘어져서 다친 사람이 많네요. 오늘 아침에 우리 윗집 사는 총각도 다녀갔는데. 조심해요, 자전거 타다가 크게 다치는 사람 많아요.”



“네, 조심할게요.”

“물리치료실로 가서 찜질받고 가요.”     







물리치료실에서 30분가량 찜질을 받고 계산을 하는데 한의사 선생님께서 접수 데스크에 나와서 간호사 선생님께 말했다.



“김간호사님, 예약 환자 몇 명 남았죠? 아, 여름 학생. 치료받으니 좀 낫죠?”

“네, 감사해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데스크 선생님께 건넸다. 그때, 한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어, 윗집 총각, 왜 또 왔어? 침 한 번 더 맞으려고? 발목이 많이 부어서 돌아다니지 말고 푹 쉬어야 해.”

내가 뒤를 돌아보니 한의사 선생님께서 유현이를 바라보고 계셨다. 


    

“뭐야, 유현이 너도 다쳤어?”라고 묻자 유현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윗집 학생이랑 여름 학생이 서로 아는 사이예요? 근데 왜 따로 왔지?”    



 

유현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을 붉은 홍당무마냥 붉게 변해있었다. 한의사 선생님은 유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윗집 총각이 여름 학생보다 더 많이 부었어. 여름 학생은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텐데, 윗집 학생은 내일도 오는 게 좋을 거야.”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는 자기도 발을 삐었으면서 날 부축해 준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예쁘고 고맙고 미안했지만 티 내면 그가 민망해할까 봐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뭐야, 내일은 내가 데려다줘야겠네.”

“윗집 총각은 계단 하나 내려오면 되는데 뭘 데려다줘요. 그러고 보니 둘이 좀 수상한데?” 우리 둘의 관계가 재밌다는 듯, 짓궂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내일 올게요. 여름아, 가자.”

아니라며 손사래 하는 그의 말에 웃으며 한의원을 나섰지만, 뭔가 빠진듯한 섭섭한 기분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난 곧 수업인데, 여름이 넌?”

“난 3시 수업이야. 점심은 먹었어? 아직이면 정문 앞에서 토스트 사 먹을래?” 한국대학교 정문에 있는 토스트집을 자주 갔던 것이 생각났다.



“좋지. 햄 토스트에 딸바 주스 먹어야겠다.” 그가 스쿠터에 올라타며 말했다.

“나도 딸기 바나나! 너 다리 아파서 스쿠터 타자고 한 거였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뭘, 얼른 타. 두 번째니까 더 빨리 달려도 되지?” 그가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쿠터를 타니 정문까지 오는데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토스트와 딸바 주스를 2개씩 주문한 뒤, 근처 벤치에 앉았다.     


      



“아, 여유롭고 좋다. 여름아, 넌 혼자 있을 때 주로 뭐해? 뭐 할 때 행복한지 궁금해” 그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물었다.



“글쎄…. 내가 뭘 하더라? 음…. 넌?”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혼자 있을 때 뭘 했지? 2008년으로 돌아온 뒤론 바빠서 따로 뭘 할 시간이 없었고 이전엔… 일하고 태형 씨 만나고 핸드폰 하고. 그 외에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가? 난 며칠 전에도 말했지만 노래 들을 때 행복해. 근데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안 물어봐서.”


“아! 난 피아노 치는 거 좋아해. 근데 안친 지 너무 오래돼서 다 까먹었어.” 그가 음악 이야기를 하자 피아노가 떠올랐다. 




“까먹을 정도로 오래됐는데도 피아노가 여전히 좋아?”


“응. 내가 살면서 가장 열정을 갖고 한 게 피아노거든.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릴 때면, 마치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듯했어.”


“근데 왜 요즘은 연주를 안 해?” 그의 천진한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또 막막했다. 취업하고 일한다고 피아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연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좋아하긴 하지만 내 전공은 아니잖아. 해야 되는 거 먼저 하려고.”

“하지만 병행할 수도 있지 않아? 나도 약대 다니지만 노래는 늘 듣는데.”



“노래 듣는 거랑은 좀 다르지. 일단 피아노도 없고 시간을 따로 내서 배우고 연습해야 하니까.”


“나도 좋은 노래를 듣기 위해 많이 검색하고 찾아 듣는 걸? 하루에 2시간 넘게 노래 찾아 들어.”

“2시간이나?” 노래는 버스 타고 이동할 때 듣는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2시간은 굉장히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응. 널 행복하게 만드는 거면 시간을 투자해도 좋다고 생각해. 행복하려고 사는 건데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보내야지. 


내가 오래 산 건 아니지만, 딱 하나 느낀 게 있다면 좋아하는 일을 미루지 말자는 거야. 언젠가는 하겠지, 하고 미루면 결국 못하게 되더라고.


내가 할머니 병원에 있으면서 주변 어르신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거야. 좋아하는 것을 미루지 말 걸 그랬다고. 다른 사람 신경 쓰고 해야 하는 일만 하다 보니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서 좋아하는 것들을 다 놓쳐버렸다고.”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자의 깨달음인거야?” 진지한 그의 얼굴이 귀여웠다.     

“그럼. 나름 1살 오빠라고.”      


그의 말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들 눈치만 보고 해야 할 일들에 묶여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잊어버린 채 살았다. 우리는 모두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시간이 영원히 주어지는 것처럼 행동한다. 나 역시, 죽기 전까지 그랬다. 이 사실을 일찍 깨닫고 실천에 옮기는 그가 너무 기특했다.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문을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라 다들 밥을 먹으러 가는지 유동 인구가 많았다.      



     

그중,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에이포 크기의 종이를 한 무더기 든 채, 담벼락에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뭘 붙이는 걸까, 생각하는 순간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수많은 종이 더미가 바닥에 떨어졌다. 여학생이 당황하며 종이를 줍자 유현이가 토스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름아, 나 잠시만 저분한테 다녀올게. 먹고 있어.”

“아는 사람이야?”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유현이는 한참 동안 무릎 한쪽을 꿇고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함께 주웠다. 그 모습을 보니 질투인지 박탈감인지 모를 처연한 기분에 울적해졌다. 종이를 다 주운 뒤, 종이 더미를 여학생에게 건네며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아서 답답함만 커졌다. 발목도 아프면서 굳이 저기까지 가서 도와줬어야만 했나. 저 여학생이 유현이에게 반한 건 아닐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으니, 여학생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여 유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현이도 미소로 화답한 뒤,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한 장 들고서 내게 다가왔다. 모두에게 친절한 그가 미웠다.     



      

“넌 다른 사람을 정말 잘 도와주는구나.” 진심 반 비꼬는 마음 반으로 이야기를 하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봤는데 못 본 척 하기가 좀 그래서. 그것보다 여름아, 이거 봐.” 그가 그 여학생이 붙이던 전단지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그 종이엔 대학생 아마추어 연극배우를 모집한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아까 그분이 붙이신 거야?”

“응. 너 연극 좋아하잖아. 내가 종이 주우면서 여쭤봤는데, 대학 연합 극단이라 규모가 꽤 크더라고. 이 극단에서 활동하다가 프로 극단으로 가는 사람도 많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이야기했네, 하고 투정 부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렇구나. 근데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 같은데. 연극 보는 걸 좋아하는 거지, 무대에 서고 싶진 않아.”

“자세히 봐. 주인공이 피아니스트야.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배우가 없어서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고. 너한테 딱이지 않아? 피아노 잘 치고 연극 좋아하고.”






그는 칭찬을 바라는 대형견처럼 빛나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현이 뒤로 흔들리는 강아지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아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긴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내 취미활동이 아니었다. 



안유현, 오직 네가 중요하단 말이다.     




“아냐, 나 피아노 연주한지도 오래됐고. 내가 무슨 재주로 무대에 서겠어.”


“여름아, 난 네가 해봤으면 좋겠어. 피아노 치는 게 너무 좋아서 일부러 전공도 안 했다며. 영원히 좋아하고 싶어서. 피아노 연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들려주고 싶지 않아?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알겠어. 지원 날짜가 11월 말이네? 한참 남았으니 손 먼저 풀어보고. 예전 실력 나오면 지원해볼게.”


“잘 생각했어!” 그가 배시시 웃자 내 마음 속 전구에도 불이 들어온 듯했다.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매주 월, 목 4시30분에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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