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29_소설)
“에이, 졌네.” 발을 땅에 내디딘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전거를 탄 채 유현이 쪽으로 넘어졌다.
“아야”
“여름아, 괜찮아?”
“발목이 접질렸나 봐.” 얼굴을 찡그리자 그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앉아서 신발 벗어봐. 내가 좀 봐줄게.”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발을 다른 사람, 그것도 유현이에게 보여주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표정 보니까 많이 아파 보이는데, 우리 응급처치도 다 배워. 얼른.”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그는 내 발목을 이리저리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발목이 많이 부었네. 내가 업어줄게.”
“아유, 아냐. 업히는 건 싫어. 넌 괜찮아? 아까 자전거 넘어질 때 바퀴에 네 발 깔렸잖아.”
“넌 이 와중에 내 걱정이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땅에 발 디딜 수 있겠어?”
“으, 아프긴 한데 천천히 가면 걸을 순 있을 것 같아. 내일 수업 마치고 너희 집 밑에 있는 한의원 가야겠다.”
“우리 집 밑에? 너 거기 우리 집인 줄 어떻게 알았어?”
“아, 같이 일하는 오빠가 말해줬어.”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아, 그 형 예전에 우리 집 온 적 있다. 맞아. 근데 한의사 선생님께서 좀 별나지?” 그가 별 의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재밌으시지. 그래서 더 찾아가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져서. 실력도 좋으시고.”
“그렇긴 해. 신발 신고 있으면 더 아프니까 맨발로 걸어가자. 내가 신발 들어줄게.” 유현이가 내 하얀 운동화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맨발로? 맨발로 걷는 건 처음이야. 기분 이상하네.”
“너만 신발 벗으면 민망하니까 나도 벗어야겠다.” 그는 편의점에서 받은 검은 봉투에 신발 두 켤레를 넣었다.
그에게 의지한 채 조금씩 발을 내디뎠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아득해져서 발목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라서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눈은 앞을 응시하고 있지만, 내 모든 감각 신경은 옆에 있는 그를 향했다.
조금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어쩌면 지금 그가 고백하려 하는 건 아닐까. 긴장감에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러나 그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내가 먼저 그에게 고백할까, 생각했지만 그가 혹시나 이전과 다른 마음일까 봐 걱정이 앞섰다.
그가 나를 좋아하던 과거로 돌아왔지만, 어쩌면 지난 생과 달라진 지금의 나에게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계속 나 혼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어깨동무를 한 채 서로에게 기댄 지금, 그는 너무나 평온한 말투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편한 친구와 있는 듯한 그를 보니 혼란스러웠다.
예전엔 그의 표정이 다 읽혔는데, 지금은 도저히 모르겠다. 행동하는 것 보면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예전만큼은 아닌 걸까. 아님 그냥 원래 친절한 사람인 걸까. 나만 바뀌면 우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름아, 집에 다 왔네. 조심히 들어가. 집에 가서 발목 찜질 꼭 하고.”
“응. 내일은 뭐해?”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개강 첫날이니 학교 가야지. 저녁엔 아르바이트 가고. 오랜만에 동기들 볼 생각하니 좋네. 넌 내일 뭐해?”
“그러게. 내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날 생각 하니 좋다. 오랜만에 학교 가면 좀 어색할 것 같기도 하고.”
내게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는 그를 보니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도. 이번엔 전공 말고 다른 과 수업도 신청해서 더 기대돼.”
“아, 그래? 무슨 수업인데?”
“심리학개론. 동기들이 들었는데 재밌다고 추천해주더라고.”
“심리학과 수업? 어떤 거 배우려나, 재밌을 것 같아.”
“너도 같이 들을래? 일주일 동안 수강신청 변경 기간이잖아. 사실 나 혼자 듣거든. 어때?”
“생각해볼게.”
생각해본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와 함께 수업을 들을 생각에 들떴다. 내일 당장 심리학과 조교 선생님을 찾아가야지. 내일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했다가, 함께 수업 듣자는 말에 이렇게 신나다니. 그의 말 하나에 내 마음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그래. 같이 들으면 좋겠다. 잘 자 여름아.”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너도 잘 자.”
다음날 오전 10시,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책상보다 익숙한 강단을 지나서 강의실 안을 둘러보니 먼저 온 동기들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활기찬 그들을 보니 내 기분도 덩달아 싱그러워졌다.
“여름아, 이쪽이야!” 강단 옆에 서있는 날 보며 혜지가 손을 흔들었다.
“혜지야,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다.”
“뭐야, 백여름. 우리 지난주에도 봤잖아. 그저께 답사는 잘 다녀왔어? 바로 예약한 거 보니 우리가 갔던 곳보다 좋았나 보네.” 혜지와 방학 때 금요일마다 답사를 갔었던 것이 떠올랐다.
“응. 학교에서 보니까 또 기분이 달라서. 배 아프다더니, 이제 괜찮아?”
“매번 하는 생리통이지 뭐. 귀찮아 정말. 오늘 오티 끝나고 애들이랑 파스타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 거지?”
“너희끼리 다녀와. 난 공강 시간에 한의원 가려고. 어제 다리를 좀 삐끗했거든.”
“으이구, 그 한의원은 달고 사네 정말. 진료 빨리 끝나면 식당으로 와.”
“알겠어.”
대화가 끝나자 박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니체 철학을 전공한 교수님의 영향으로 나도 졸업 후 대학원에서 니체를 공부하고 조교수를 했었다. 박교수님의 젊은 모습 역시 새로웠다. 교수님은 강단에 서서 주위를 쭉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아모르파티! 삶의 어려움까지 즐겨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가 한 학기 동안 배워야 할 니체의 기본 철학이야. 니체의 철학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든단다. 너희가 니체의 정신을 이어 삶을 긍정하고 즐기길 바란다."
그래, 내가 이 수업을 들은 후, 니체의 철학에 반해서 공부를 시작했었지. 고민 많고 소심했던 과거의 나와 달리 매 순간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니체의 철학을 공부할수록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삶의 끝자락에서 1년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얻은 지금, 니체의 말이 더욱 와닿았다.
수업을 듣고 있는데 유현이에게 문자가 왔다.
‘여름아 다리는 어때? 병원 갔어?’
‘괜찮아. 지금 수업 중인데 끝나고 병원 가려고.’
‘난 오늘 오후 수업만 있어. 수업 끝나면 12시지? 내가 데려다줄게.’
‘그러면 고맙지.’
그에게 부탁하기 미안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수업이 끝나고 1층으로 내려가자 스쿠터를 탄 유현이가 보였다.
“스쿠터 타고 가려고? 좀 무서운데….” 그의 뒤에 타기를 망설이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괜찮아. 천천히 갈게. 너 다리 아픈데 걸으면 덧날까 봐.”
“그럼 정말 기어가야 해? 거북이처럼.”
“네, 엉금엉금 갈 테니 걱정 말고 타셔요.” 그가 싱긋 웃었다.
그에게 여러 번 약속을 받아낸 후, 그의 뒤에 탔다. 심호흡을 하며 그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이제 출발한다? 꽉 잡아.”
“잠깐! 잠깐만, 조금만 있다가. 잠시만 기다려줘.” 그가 천천히 가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겁이 났다.
그때, 철학관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기들이 점심을 먹으러 내려오는 듯했다. 동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유현이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유현아. 빨리 출발해줘.”
“지금? 알았어.” 유현이는 뒷말 없이 바로 출발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이 조금 두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긴장이 풀렸다.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쥔 손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는지, 빨간 불로 신호가 바뀌었을 때 그가 말했다.
“괜찮아? 많이 긴장한 것 같던데.”
“응. 괜찮아. 처음엔 무서웠는데 이젠 탈만해.”
“아깐 왜 갑자기 출발하자고 했어?”
“아…. 친구들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도망쳐버렸네.”
내 말을 듣고 그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곧 녹색 불로 바뀌어서 스쿠터가 출발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였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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