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28_소설)
그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아, 우리 그냥 계단으로 갈래? 사람 너무 많은데.”
“여기 8층인데? 음, 그래도 그게 더 빠르겠다. 그러자.”
비상구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계단이 보였다. 비상계단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계단 위에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해서 내려갔다. 으슥한 곳에 둘만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색한 침묵은 내 마음을 전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란 것을 안다.
지금 고백할까?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 입을 쉽사리 떼기 어려웠다. 유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도 없이 빠른 속도로 걸을 뿐이었다.
좁은 계단에서 함께 걸으니, 서너 걸음마다 한 번씩 손등이 스쳤다. 그는 내 손을 잡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손끝을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아까 내 입에 닿았던, 커다란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손 잡기가 왜 이토록 어려운건지. 지난 인생에서도 그를 그토록 좋아했으면서 단 한 번도 손을 잡아보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때문인지, 야릇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손끝이 스치는 찰나의 촉감과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그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몽롱한 이 기분에 취해 내려가니 어느새 1층이었다. 1층 출구로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오만가지 생각이 밀려왔다. 그를 따라 출구로 나갔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왁!” 그가 큰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살짝 잡았다.
“깜짝이야, 너 어제부터 계속 그럴래?”
“네가 놀라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아까 계단 내려올 때 좀 무섭지 않았어? 깜깜하고 한참 내려가야 하니까.”
“조금.” 무섭다기보단 야릇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의 장난에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이었다.
“여름아, 야식 뭐 먹을래?”
“팝콘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안고프네. 유현이 넌 어때?”
“사실 나도 그래. 그럼 편의점에서 맥주 사서 집까지 걸어갈까?”
“지하철 2 정류장 정도 걸어야 되는데 괜찮겠어?”
“그럼.” 내가 운동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지상철 아래에 있는 강변 산책로를 걸었다. 낮에는 더웠지만, 밤이라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10분 정도 걸었을 때, 자전거 대여소가 눈에 띄었다.
“어, 여기 자전거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네? 무룐가?”
“응. 나 가끔 여기서 빌리는데, 신분증 맡기면 2시간 동안 무료로 탈 수 있어. 강변 산책로에서 자전거 타면 좋더라고.”
“그렇구나. 난 자전거 안 탄 지 10년은 된 거 같은데. 유현이 네 말 들으니까 오랜만에 자전거 타고 싶다. 예전엔 매일매일 탔는데.”
“10년? 그럼 초등학생 때 타고 안 탄 거야?”
“아, 그건 아니지. 나 고등학생 때 자전거 타고 등하교했는걸.”
“뭐야, 그럼 2년밖에 안됐네.”
“그러게. 근데 뭔가 오래된 기분이 드네.” 에고,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자전거 타고 등하교했으면 꽤 잘 타겠는데?”
“그럼. 손 놓고도 탈 수 있지!” 내가 양 팔을 벌려 자전거를 타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중고등학생 때 허세 부린다고 손 놓고 타다가 넘어지는 애들 많이 봤는데, 너도 그런 거 아냐?”
“아냐 정말이야! 우리 고등학교가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 위로 자전거 타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대단했다고.”
“아이고, 그러셨어요?” 그가 귀엽다는 듯이 날 바라보니 부끄러웠다.
“그럼! 그때 종아리에 알이 생겼잖아. 나와 평생 함께 할 줄이야.”
“근데 오르막에선 자전거 두고 걸어가는 게 더 편하지 않아? 왜 힘들게 타고 가?”
“학교 마치고 자전거로 내리막을 달릴 때 기분이 너무 좋거든. 야자하고 심자하고 나면 새벽 1시였어. 그 시간엔 차도 없으니까 더 신나기도 하고. 말하다 보니까 자전거 너무 타고 싶은데?”
“그래? 그럼 타자.”
“지금 어떻게 타? 자전거도 없는데.”
“저기 자전거 많네.” 그가 자전거를 세워두는 낡은 거치대를 보며 말했다.
“저걸 타자고? 도덕적인 안유현씨 아니었나요?” 내 말에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아주 잠시만 타자는 거지. 지금 아무도 안 타니까. 내가 오며 가며 예전부터 봤는데 저 자전거들 주인이 버리고 간 거 같더라고. 잠깐만 타보자.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지.”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자전거 거치대에는 10대가 넘는 자전거들이 관리가 안되어 쓰러질 듯 모여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자전거였지만, 대부분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자물쇠가 있는 거 보면 주인이 있는데 왜 이렇게 오래 방치했지? 까먹었나?”
“그럴지도. 한 때 소중했던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니까. 앗, 여름아 이 자전거 타면 되겠다! 내가 먼지 닦아줄게.”그는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은 자전거 두 대를 꺼내 자신의 팔로 안장에 앉은 먼지를 쓱쓱 닦았다.
“고마워, 유현아. 와 정말 오랜만이야.” 자전거에 앉으려고 다리를 들었으나 안장이 너무 높았다.
“네 키에 안 맞나? 잠시만, 안장 조절해줄게. 음,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안장 조절이 안되는데, 다른 걸로 찾아볼까?”
“아냐, 탈 수 있어. 원래 자전거 탈 때 발이 땅에 안 닿게 타야 더 재밌지!”
“그래? 그럼 백여름씨가 자신만만하게 자랑하던 자전거 실력 좀 볼까요?” 그가 자전거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럼! 우리 저기 있는 나무까지 왕복으로 누가 빨리 달리나 내기하자!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그가 이전에 게임에서 이겨서 나와 손잡자고 한 소원을 쓴 것이 생각났다. 이번엔 내가 이겨서 손잡자고 해야지. 그 생각으로 자전거 위에 올라서서 페달을 밟아 출발했다. 상쾌한 밤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밤공기가 상쾌했다.
“백여름, 너 이거 반칙 아냐?
“승부에 반칙이 어딨어! 얼른 따라와 보시지!”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와 시원한 바람과 웃고 있는 유현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무에 도착해서 핸들을 돌리는데 유현이가 뒤따라온 것이 보였다.
그는 “이제 안 봐준다, 너.”라고 말하며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갔다. 열심히 페달을 밟았으나 그를 따라잡진 못했다. 이미 도착해서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달렸다. 내기에선 졌지만, 그의 웃는 얼굴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고백은 언제든 기회가 많은 것 아닌가.
“에이, 졌네.” 발을 땅에 내디딘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전거를 탄 채 유현이 쪽으로 넘어졌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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