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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Nov 11. 2021

너랑 함께면, 여기가 카오산로드지.

첫사랑을 만난다면(26_소설)



“아, 흰 옷인데 어떡해.”

“내가 사장님께 물티슈 있나 여쭤볼게. 잠시만 기다려.” 그가 당황하며 말했다.



     

흰 옷을 입고 오면 꼭 이렇게 뭘 흘린다니까, 하며 옷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맥주를 다 쏟은 바람에 하얀 옷이 젖어 속옷 라인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유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서 티셔츠 아래를 손으로 잡아 최대한 속옷과 떨어지게 만들었다.   


       

“물티슈 고마워, 유현아.”

그의 시선을 돌려보려 애썼지만, 그의 귀는 이미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겉옷이 있으면 벗어주면 되는데…. 일단 가방으로 가릴래?” 그가 자신의 가방을 건넸다.     

“응, 고마워. 옷을 사야 될 것 같아. 시장이니까 파는 곳이 있겠지?”



“야시장만 열고 일반 시장은 다 문 닫은 거 같은데…. 아, 저기 옷도 파는 것 같은데, 한 번 가보자.”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포장마차 사이로 작은 옷가게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사장님께서 옷걸이에 아동용 원피스를 여러 벌 걸어두고 판매하고 계셨다.     

“사장님, 혹시 제가 입을 수 있는 옷도 있을까요?”

“딱 하나 있어요. 11000원입니다.” 사장님께선 작은 코끼리가 수놓아진 검은색 원피스를 꺼내서 보여주셨다.




“아, 다행이다. 혹시 옷 갈아입을 공간이 있나요?”


“저희는 가게가 따로 없어서요. 화장실에 가셔야 하는데 멀리 있어요. 좀 더 지나면 잡화 파는 야시장이 나오는데, 거기 지나서 불 꺼진 왼쪽 골목으로 쭉 가면 보일 거예요.” 사장님께서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시며 말씀하셨다.



“네, 감사합니다. 유현아, 그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멀다는데 같이 가자. 저쪽은 어둡잖아.”

“그럼 고맙지.”          




사장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걸어가니 여러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석고 방향제의 레몬향이 코끝을 맴돌았고, 각종 핸드폰 액세서리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와, 음식 파는 곳이랑 완전 분위기가 다르네. 나 액세서리 구경하는 거 좋아해. 귀여운 거 보면 기분이 좋아져.”



“그래? 그럼 옷 갈아입고 구경하러 오자.”     

야시장 골목은 사람들도 많고 조명이 밝아서 마치 낮인 듯 밝은 분위기였는데, 일반 시장길로 들어오니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 어두웠다.     





“깜깜하고 사람이 없어서 좀 으스스하네. 너랑 같이 와서 다행이야.”


“그러게. 야시장 골목에 화장실이 없는 게 아쉽다. 어, 저기 화장실 표지판 보여.”     


한참 걸어야 하긴 했지만 다행히 공영화장실 표지판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가니 낡은 건물 2층에 남녀 공용 화장실이 있었다. 조명이 어둡고 좁은 화장실이라 겁이 났다.  



   

“유현아, 혹시 앞에 있어 줄 수 있어? 남녀공용인데 어두워서 좀 무섭네.”

“그래.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 있어야 해.”

“응. 걱정 말고 옷 갈아입어.”          




하얀 티셔츠와 붉은색 치마를 벗고 태국식 원피스로 갈아입으려 하니, 벗은 옷을 놓을 공간이 없었다.

“유현아, 내 옷 좀 받아줄래? 위로 넘길게.”

“….”

“왜 대답이 없어? 거기 있는 거 맞지?”




마음이 불안해진 나는 재빨리 원피스로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내 앞엔 세면대와 칠흑 같이 어두운 복도가 보일 뿐, 유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안유현, 너 또 어디 숨은 거지? 장난치지 말고 얼른 나와!”




그를 찾다 마음이 불안해질 때쯤, 유현이가 “왁!”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내가 “꺄”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자 유현이는 그런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이내 크게 웃는 그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안유현, 너 진짜!”


“오늘은 공포의 날이야. 연극부터 이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또 할 거니까 기대해.”

“너?! 너 이리 와 정말!” 내가 소리치자 그는 한 손엔 맥주를, 다른 한 손엔 회오리 감자를 들고 뛰어갔다.     




“어, 나도 옷에 맥주 흘려! 그만 쫓아와!” 그와 있으면 정말 21살로, 아니 11살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불 꺼진 시장에서 추격전을 펼쳤다. 그를 잡으려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그는 내게 잡힐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빠르게 달렸다. 갈래길이 나와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살피고 있는데, 그가 골목에 숨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놀란 게 괘씸해서 되갚아주려 살금살금 다가갔다. 숨죽여 아주 조금씩 다가가서 그를 놀라게 하려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리며 더 큰 소리로 나를 놀래켰다.



“으아 깜짝이야! 뭐야, 난 줄 어떻게 알았어?” 그는 앞에 있는 유리창을 가리켰다.

“여기 다 비치던데. 여름이 네 표정이 너무 비장한 게 웃겨서 웃음 참느라 혼났어.”



, 정말!”
근데, 여름아.   원피스 너무  어울린다. 예뻐.” 그의 말에 엔도르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휘감아도는 듯했다.




“뭐래, 이제 돌아가자. 뛰었더니 목말라. 너 맥주 남았어?”

“응. 근데 뛰다가 좀 흘렸어. 누구 때문에.” 그가 나를 흘긋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




“그럼 나 한 입만.”

“얼마 안 남았으니 다 마셔. 대신 네가 한잔 더 사야 된다?”

“알겠어. 우리 아까 액세서리 파는 곳 가볼래?”     





유현이와 투닥거리며 잡화를 파는 야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평소 문구점에 가면 예쁜 물건들을 한참 구경하는 나였기에,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핸드폰 케이스, 열쇠고리, 인형, 볼펜, 공책 등을 구경하는 내내 유현이는 내 옆에서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한 사장님께서 말을 거셨다.          

“커플 분들, 이거 좀 보고 가세요. 제가 손수 만든 팔찌인데 수익금을 전부 백혈병에 걸린 아동들을 위해 쓰고 있어요.” 그 말에 유현이는 몸을 돌려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와, 너무 잘 만드셨는데요? 좋은 일 하시네요. 여름아, 이거 하나 사자. 너 하나 골라봐. 내가 사줄게.”



“팔찌를? 그래 좋아. 그럼 나는, 이 빨간색 스파이더맨 팔찌로 할게!”

“그럼 나는 검은색 배트맨으로 해야겠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셔요. 태국 옷을 입으셔서 그런지 신혼여행 오신 것 같기도 하고. 이 거리도 카오산 로드랑 굉장히 비슷하거든요. 예쁘게 잘 쓰세요.” 


사장님은 바로 구입해준 우리가 고마운지 계속 우리에 대한 칭찬을 했다.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부정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웃고만 있었다.          






“유현아, 팔찌 사줘서 고마워.”

“뭘, 네가 맥주 사줄 건데.”



“근데 갑자기 팔찌는 왜 산거야? 너 팔찌 좋아해?”


“그냥. 난 누가 아픈 게 참 싫어. 특히 어린아이들이 병에 걸린 걸 볼 때마다 하늘이 원망스러워. 왜 이렇게 작고 어린아이들에게 시련을 주나 싶어서. 내가 얼른 졸업하고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지금은 학생이라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네.”


“그랬구나.” 그의 눈을 보니 그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여름아, 너 카오산 로드 가봤어?”

“응, 가봤지.”



“우와 좋겠다. 여행자들의 거리라고 하잖아. 난 아직 해외여행을 안 가봤어.”



“아, 가족끼리 어릴 때 가봤어. 기억도 잘 안나. 아, 우리 어제 사진 찍은 거 깜빡하고 안 보냈다. 오늘 집에 가서 메일로 보낼게.” 사실 결혼을 약속했던 태형씨와 30살에 가보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순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응. 나도 어제 찍은 사진 보니까 200장이더라. 흔들린 사진 지워도 엄청 많아. 베스트 컷만 골라서 인화해서 줄게. 너 엽기사진 엄청 많던데, 그것도 줄까?”



“아니, 당장 지워! 확대하지 말고 바로 지워!” 그가 내 이상한 사진을 볼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이미 봤는데. 웃기게 나온 사진도 귀엽더라.” 그의 말에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기서 팟타이 사서 맥주랑 같이 먹자. 그럼 거기가 카오산로드지 뭐.”

“그래, 그러자. 시끌벅적한 거리라고 하니, 여기랑 딱 맞네.”  



   

유현이와 함께 팟타이를 먹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하늘을 바라봤을 뿐인데, 세상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이 하늘이 준, 내 마지막 1년에 다시금 감사했다.


         







며칠 전 인스타 독자님께서 “소설이 카오산로드랑 잘 어울려요. 카오산로드를 배경으로 해보시면 어때요?” 하시더라고요!

유현이와 여름이를 태국으로 보낼 순 없어서 야시장에서 카오산로드 느낌을 내봤습니당ㅎㅎ


문득 여행이 너무 가고 싶네요ㅠㅠ ㅎㅎ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매주 월, 목 4시 30분에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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