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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Nov 08. 2021

친구한테 전화하는 척, 속마음을 이야기해.

첫사랑을 만난다면(25_소설)


그 종이엔 ‘콜!!’이란 짧지만 기분 좋은 단어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얘들아, 많이 바빴지? 근처 슈퍼에 연유가 떨어져서 좀 더 멀리 다녀온다고 늦었어.” 사장님께서 돌아오시자 유현이가 홀으로 나왔다.     




우리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나는 쑥스러워서 펜과 종이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는 종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쪽지 못 봤어요? 같이 가요!” 그의 맑은 웃음에 뺨이 발그스름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몸을 돌려 컵에 찬 물을 따랐다.          






“유현씨, 우리 반말할래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갑자기요? 제가 나이 더 많은데.”



“거짓말. 빠른 87이면 동갑이죠. 빠른 년생 우리나라에만 있잖아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곧 없어질걸요?” 내가 포스기에 직원 생년월일이 적힌 파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켰네. 그러자, 여름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 마시던 물이 설탕을 탄 듯 달콤하게 느껴졌다.   



  





일이 마친 후 4시, 우리는 카페를 나서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여름씨랑, 아니 여름이 너랑 같이 걸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어제도 몇 시간 내도록 같이 걸었으면서?”



“그러게. 카페 알바하고 같이 가서 그런가. 어제보다 더 이상하네.”

“아, 우리가 이전에 만났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사장님 말씀으론 같이 커피도 마셨다던데?”




“숙제야. 기억해 보도록!”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오래전 일이라 그런가?”



“시간 많이 안 지났는데? 한 달 밖에 안됐어.”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달 전 일이라도 내겐 12년 전에 일어난 일이니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30분가량 지하철을 탄 후, 극장에 도착했다. 소극장에 들어서기 전, 우리는 심약자 관람불가, 관객 참여형 연극 형식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했다. 지난번엔 늦게 도착해서 제일 뒷 줄에 앉았지만 이번엔 서두른 덕에 두 번째 줄에 앉을 수 있었다.     



          

무대 가까이 앉으니 으스스한 소품들과 실감 나는 배우들의 연기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무서운데?” 그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때, 불이 꺼지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스산한 분위기에 한껏 움츠러들었고 팔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빨간 핀 조명이 무대가 아닌 객석 몇 군데를 비추니 주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불안함이 고조된 순간, 붉은 핀 조명이 우리를 비췄다. 우리 발 아래엔 귀신 분장을 한 배우가 누워있었다. 나는 “꺅”소리를 지르며 유현이 팔을 붙잡았고 그는 다른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려움에 눈을 감았으나,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커피 향이 감도는 그의 체취에 마음이 안정됐다. 그러나 이내 극장 안에 조명이 켜지고, 그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유현이 앞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인,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연극에 집중하지 못했다. 내 마음은 온통 유현이와 어떻게 1년을 보내야 하는지, 그의 마음은 이전과 같은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연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자 그가 말을 걸었다.     




“여름아, 많이 무서웠어? 표정이 안 좋아. 우리도 일어나자.”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뒤 출구로 나섰다. 그런데 사람들이 빨리 나가지 않고 출구 옆 작은 탁자에 빙 둘러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추억을 선물로 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귀신 분장한 배우를 본 관객들의 표정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      




“아, 아까 빨간 조명 켜졌을 때 사진인가 봐. 우리 사진은 어디 있지?”

“여름아, 여기 있다! 사진 웃기게 나왔는데? 봐봐.” 그 사진 속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나와 나를 감싸 안은 유현이의 넓은 등이 보였다.




“그러게. 근데 포스트잇에 뭐라고 적혀있는데? ‘베스트 포토상, 카운터에서 선물을 받아 가세요.’래.”


“베스트 포토상이라니, 나 이런 거 처음 받아봐. 신기하다.” 넓고 따뜻했던 그의 등이 신경 쓰이는 나와 달리, 그는 그저 선물이란 말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운터에 가서 포스트잇을 보여드리니, 자신을 연출가로 소개한 젊은 남성분이 말씀하셨다.

“안녕하세요. 베스트 포토상을 받은 관객분께는 영화쿠폰을 두 장 드려요.”

“와, 감사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건 선택 사항이지만, 혹시 저희가 이 연극을 광고할 때, 두 분의 사진을 사용해도 될까요?”

그가 나를 바라보기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네, 좋아요.”라고 말하며 공연 관계자가 건넨 종이에 서명했다.






“공연 재밌었다. 아직도 심장이 뛰어.”

“그러게. 이렇게 영화 쿠폰도 받고, 기분 좋은데? 여름이 넌 어떤 영화 좋아해?



“음, 로맨스나 로맨스 코미디 자주 봐.”

“그래? 난 공포연극 보자길래 스릴러나 호러 좋아할 줄 알았어.” 전 남자 친구가 공포연극을 좋아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 그것도 좋아하긴 하지. 혹시 ‘비포 선라이즈’ 영화 알아?”

“아니, 처음 들어봐. 어떤 내용인데?”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동안 함께 여행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야. 큰 사건 없이 대화로만 이뤄지는데, 대화를 통해 서로의 삶에 다가가고 결국 사랑에 빠지게 돼.”



“대화가 잘 통하는 건 정말 중요하지. 한번 봐야겠네. 특히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어?”




“음, 서로 고백하는 장면이 예뻐.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서 친구한테 전화하는 척하면서 상대에 대한 속 마음을 이야기하거든.”



“어떤 식으로?



“음, 예를 들면 이렇게. 혜지야, 내가 최근에 어떤 사람이랑 만났는데, 이 사람 눈이 참 예뻐. 엄청 맑고 깊어서 보고 있으면 빠져 들게 돼. 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와.” 그의 큰 눈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혜지는 진짜 네 친구 이름이야?”

“응. 내 제일 친한 친구야. 같은 과 동긴데, 우리 카페 자주 와서 너도 얼굴 보면 알 수도 있을걸?”



“그렇구나. 그럼 혜지씨한테 한 말도 진짜야?”


“무슨 말?" 말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눈빛에 내 진심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서 괜히 더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좋아한다는 내 마음을 전하려 이 때로 돌아온 거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고 준비되지 않은 고백은 싫었다.




"아, 아까 한 말?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그냥 지어낸 거지. 네가 영화 내용 궁금하다고 했잖아.”


“지나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무튼, 집에 가서 영화 봐야겠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허둥대는 나와 달리 그는 여느 때 같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유현아, 너 괜찮으면 야시장 갈래? 나 야시장 가보고 싶었거든.”

“좋아! 하고 싶은 건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하는 게 좋지!” 그는 좋은 선택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야시장에 들어서니 작은 포장마차들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포장마차에선 닭꼬치, 떡볶이부터 곱창볶음, 야채 삼겹말이, 타코야끼, 해물볶음우동 등 다양한 음식들을 판매했다. 야시장이 오픈 한 지 10분밖에 안됐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우와, 이런 곳이 있어? 낮에 보는 시장이랑 완전 다르네. 한국이 아닌 것 같아!”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사실 나도 말만 듣고 처음 와 봐. 저기 생맥주 파는 곳 있다! 일단 맥주부터 사서 한 바퀴 둘러볼래?”




 우리는 테이크 아웃 잔에 든 맥주를 들고서 야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깜깜해진 하늘과 달리 야시장은 노란빛 조명과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빛났다. 30대로 보이는 젊은 사장님들께선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셨기에 입과 눈이 모두 즐거웠다.



          

“우리, 치즈 구이 먹자! 에피타이저로!”

그의 손에 이끌려 바로 앞 포장마차로 향했다. 치즈를 길쭉한 네모 모양으로 만들어 나무젓가락에 구운 간단한 요리를 먹으니 입맛이 돌았다. 이후 우린 불닭 볶음과, 야채 삼겹말이, 씨앗호떡을 샀다.



“식당에 가면 음식 하나밖에 못 먹어서 아쉬운데, 여기선 조금씩 파니까 여러 종류를 먹을 수 있어서 좋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음식에 진심이네?”

“당연하지. 여름아, 우리 저기서 팟타이도 사자! 태국분이 요리하시는 것 같은데?” 




“유현아, 우리 이제 음식 들 손도 없어.”

“괜찮아, 내가 다 들 수 있어. 마지막으로 팟타이만 사서 의자에 앉아서 먹을래?”

“못 말린다, 정말. 나보다 네가 야시장을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때, 빵빵 경적이 울리더니 좁은 야시장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가 빠르게 달려왔다. 내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놀라서 맥주와 불닭 볶음을 하얀 티셔츠에 모두 흘리고 말았다.










매주 월요일, 목요일 4시 30분에 업로드합니다!

첫사랑을 만난다면 브런치북 <- 관심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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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 @bombi_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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