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눈 May 08. 2023

결국, 돌고 돌아 예술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대부분의 기억은 예술과 관련된 것이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엄마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 안, 갈색 건물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1층엔 미술학원이, 2층엔 피아노 학원이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를 배우기 어린 나인데, 엄마는 사람은 예술을 해야 한다며 내 손을 잡고 학원 문을 두드렸다.


5살부터 시작된 예술과의 만남은 15살까지 이어졌다. 그맘땐 실력이 꽤 좋아서 한 해 받은 상장만 50개가 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물론 부모님께서도 내가 피아노 혹은 미술을 전공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무렵, 예술이 아닌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진로를 바꿨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때 사귄 친구들이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라 분위기에 휩쓸렸을 수도, 혹은 내게 전공할 만큼의 재능은 없다는 걸 깨달았을 수도, 좋아하던 예술이 직업이 되면 싫어질까 봐였을 수도, 피아노와 미술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서 세 번째 대안을 했을 수도... 이런 무수한 이유가 섞여있다.)

  

그 후 15년 간, 건반과 붓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방 한 편의 피아노엔 뽀얀 먼지가 쌓인 지 오래였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조차 그림을 끼적이지 않았다.


삶의 모든 시간을 함께한 예술을 단 한 번도 찾지 않다니, 매정해도 그렇게 매정할 수가 없었다.     


싫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일부러 피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학업에 정진해서일까, 이상하리만큼 그들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조금 쓸모없는 말을 덧붙이자면, 내 연애 스타일도 그렇다. 한 번 마음이 돌아서면 미련이 남지 않아, 그 사람을 단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공부가 아니라 예술을 시켰어? 보통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지 않나? 그랬으면 더 좋을 대학 갔을 텐데."

"엄마가 살아보니 삶이 지치고 힘들 때, 기댈 곳이 필요하더라고. 엄마가 계속 네 옆에 있을 순 없으니, 예술이 그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해서."


그때만 해도 엄마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삶이 버거울 땐 예술이 아닌 예능을 찾고, 매운 걸 먹고, 친구와 수다를 떨었던 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15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된 지금, 다시 예술을 찾았다.

엄마 말이 맞았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돌고 돌아 내 마음이 힘들 때 찾은 기댈 곳, 비빌 언덕은 예술이었다.




나는 최근, 조율되지 않아 헐거워진 건반을 누르고 서툰 붓질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소중한 것과의 재회이기에, 악보를 준비하고 팔레트를 씻는 동안은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피아노와 이젤 앞에 앉은 내 마음은 그것과는 달랐다.

그 기분은 마치... 뭐랄까,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찾는 이유는, 그 거리에 녹아 있는 추억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찾은 고향엔 새로운 가게들이 즐비하고 추억의 거리는 형체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새로 생긴 유명 체인점들이 밉고, 없어진 단골 가게에 속이 허한 기분만 느끼고 돌아온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처럼, 익숙하기만 했던 건반과 붓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악보를 보는 내내 계이름을 하나씩 손으로 세고, 간단한 채색도 엉망이었다.

분명 오랫동안 사용한 내 피아노와 붓인데, 처음 보는 물건인 양 낯설었다.



하지만 아무리 퇴색됐어도 고향은 고향이다.

시대가, 상황이 바뀌었어도 본질은 같다.

달라진 모습에 당황스럽고, 속절없이 흐른 시간이 원망스럽지만, 고향에 가면 왠지 모를 위안을 받는다.



예전과 다른 손놀림에도, 나는 또다시 빠져들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내겐 고향과도 같은 것이 예술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독서일 수도 축구일 수도 어릴 적 엄마가 해준 음식일 수도 있겠다.


위안이 필요하거나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찾게 되는 그것,

오랜만에 마주하니 낯설지만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지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년 만에 다시 찾은 브런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