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대기업 입사지원을 처음 해봤다.
다 떨어졌다.
진짜 무슨 자신감으로 공인영어점수도 관련 경력도 없이 인사직무로 떡하니 입사지원을 했을까....?
학교도 지방 국립대, 학점 3점 후반, 직무와 전혀 무관한 전공, 컴퓨터 활용능력 2급, 직업상담사 2급, 운전면허 1종 보통. 끝. 지금 생각해봐도 그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직업상담사인 내가 지원을 해봐야 아이들에게 뭐라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학교에서 컨설턴트로 근무 당시, 대기업, 공기업을 지원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걸?"이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하고 가볍게 모조리 떨어졌다. 대기업 5군데 정도 지원했던 것 같다. 그때 처음으로 자세히 대기업 채용 시스템에 대해 공부하고 분석해봤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 갑자기 대기업은 나이도, 학벌도 내가 범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노선을 갈아 타게 된다. 그 당시, 나이, 학교, 출신 등을 보지 않는 공기업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되던 시즌이였고, 정신이 잠깐 나가서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 하고 공기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퇴사 이유는 간단했다. 30살이 되기 전 공기업에 지원이라도 해봐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취업 준비를 하던 졸업시즌에는 그냥 무조건 취업이 목표였다. 어떤 기업에서 어떤 직무로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을 버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러다 어찌어찌 직업상담사로 취업을 했고 고용노동부 민간 위탁기관에서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일을 하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나에 대한 고민만 5년째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기업 출신이라는 네임에 욕심이 생겼다. 일단, 취업컨설턴트들 중 인사담당자 출신들이 많았고, 공기업/대기업 출신이 성공(?) 하는 걸 많이 보다 보니, 그냥 그 사람들과 같은 루트로 성공을 하고 싶었다. 그냥 공기업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다기보단 "공기업에서 일을 하고 나오면 취업컨설턴트로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퇴사를 하고 준비를 했다.
공기업을 가고 싶은 이유가 딱히 없었다. 난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며, 내가 하고 싶은 직무채용이(직업상담)있는 공기업이 많이 없었고, 공기업 사무의 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더욱 맞는 접점은 없었다. 연봉 역시, 지금 다니는 회사 보다 높진 않았다. 그냥 oo 공기업 출신! "나 거기 다니고 있어" 이걸 원했던 것 같다.
3개월간 가고 싶지 않은 기업을 준비하는 건 어려웠다. 회사를 다니면서 한국사 1급을 준비하고 적성과 맞지 않는 전산회계, 전산세무, FAT 자격증을 취득했다. 입사지원에 필요한 어학점수를 취득하기 위해 토익 스피킹을 준비하고, 실무에 적용되지도 않는 NCS 공부를 하면서 우울감이 몰려왔다. 과연, 이게 맞는 길인가..? 남들 다하는 거 나라고 못해? 가 아니라 남들 다하는걸 해서 내가 얻는 게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갈 수 있는 직무는 한정적이었다. 사무직..소위 말하는 행정사무, 기획이나 인사 총무 등.. 기술직을 지원할 수 있는 전공도 아니고 경력도 없고 자격증도 없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일반사무직 이외에는 갈 수 있는 직무가 없다. 충격이었다.
대기업, 공기업에 다녀보지 못한 패배감이 싫었던 걸까.?
내가 아무리 좋은 회사를 들어가도 나에게 맞지 않다면 과감히 퇴사할 사람인 걸 내가 너무 잘 알아서 일까?정말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패배감도 맞았고,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내 발로 퇴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맞았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회사에 굳이 정서적인 압박감을 줘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접은 건, 사람인에서 본 채용 공고였다. 나의 경험과 자격을 충분히 녹일 수 있고 이전 경력과 사뭇 다른 직무지만 경력이 인정되는 그리고 스타트업. 자유로움에서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원했고 아니나 다를까 바로 붙었다. 나는 직업상담 경력으로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도 덜컥 합격을 하고 2개월 만에 퇴사를 했다.
참, 줏대 없는 사람 같았다. 잘 하던 대학 컨설턴트 업무를 가볍게 놓고 공기업 준비를 달랑 3개월 하다가 갑자기 스타트업에서 2개월을 근무하고, 다시 하던 컨설턴트 업무를 하고 있다. 중요한 건, 후회는 없다. 일단 남들 다하는 대기업, 공기업 준비를 나름 타이트하게 했고 그 덕분에 청년층 컨설팅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스타트업에서 겪어보지 못한 환경과 직무를 경험해보면서 직업상담사가 나에게 찰떡이라는 걸 알게 되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었다. 나의 20대는 이렇게 화려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하기 싫은 것을 해봐야 한다
5번의 퇴사와 6번의 입사를 맛보고 나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만족하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30% 정도는 알게 되었다. 결론은 나는 대기업, 공기업을 못 간 패배자가 맞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찾은 승리자이기도 하다.
'oo 기업 인사팀 출신 컨설턴트' 가 아닌
'직업상담사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 이 되고 싶었다.
20살,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미래와 직업/직무에 대해 수 천 번을 고민했고, 내가 정말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나였지만,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더 높은 목표와 열정을 갖게 되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