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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 아니라 '명징'이 필요했다.

처음 만난 '명징'

by 독학력 by 고요엘

MIT슬론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이자 조직심리학의 대가인 에드거 샤인(Edgar H.Schein)은 미래학자 밥 조핸슨(Bob Johansen)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확신과 명징은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위치한다. 확신은 어떤 관점을 믿고 고수하는 것으로, 종종 맹렬한 논쟁을 동반한다. 반면에 명징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더 많이 보고 배우는 능력으로, 사건 전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확신에서 벗어나 명징을 키우는 것은 겸손한 질문의 태도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점 중 하나다.”

밥 조핸슨은 '확신'의 반대를 '불확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명징', 즉 '더 많이 보고 배우고 온전히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명징'이라는 말은 낯설다. 우리는 확신을 덕목으로 배워왔다. 틀림없이 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간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그 확신이야말로 우리를 자주 가두어 버린다.

밥 조핸슨은 'Full-Spectrum Thinking'에서 이렇게 말한다. “을 가르는(Categorical) 사고는 우리를 확신으로 끌어가지만, 명징에서는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그는 책 전체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More clarity, less certainty”.

여기서 '확신(確信)'은 ‘굳을 확(確), 믿을 신(信)’이다. 문자 그대로 ‘굳게 믿는 것’이다. 영어 certainty 또한 같은 맥락이다. ‘확고하여 변할 수 없는 상태.’ 이 확신은 일견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굳게 믿는 만큼, 굳게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명징(明澄)'은 ‘밝을 명(明), 맑을 징(澄)’이다. 빛처럼 밝고, 물처럼 맑아 혼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영어 clarity 역시 ‘clear(맑다, 깨끗하다)’에서 온 말로, 사물이 뚜렷하고 이해가 쉽게 드러나는 것을 가리킨다. 명징은 확신처럼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흐릿한 가운데서도 빛을 밝히며, 모호함을 견디면서 본질을 드러낸다.

확신은 문을 닫지만, 명징은 창을 연다. 확신은 이미 답을 안다고 선언하지만, 명징은 아직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눈앞의 사물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본다. 그러므로 명징은 모호함 속에서도 빛을 찾는 태도다. 우리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불빛을 더 밝히고 풍경을 더 뚜렷하게 보는 일은 가능하다. 조핸슨이 말하는 명징은 바로 그 불빛에 가깝다.

우리는 '확신'을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도 확신을 강요하고, 이념도 확신을 강요하고, 심지어 자기계발도 확신을 강요한다. 단언적 확신이 없으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되고 무능한 사람이 된다. 명징의 과정 없이 확신에 이르는 사람을 더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비단 종교만의 강요가 아니다. 에드거 샤인은 그의 책 'Humble Inquiry(리더의 질문법)'에서 미국의 문화가 명징보다는 단언과 확신을 강요하는 문화라고 비판했는데, 그래도 수평적 질문과 토론 문화가 발달해 있는 미국을 이렇게 비판한다면 한국은 어쩌나 싶었다. 이 시대는 예측이 무너지는 시대다. 미래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그래서 확신은 오히려 위험해진다. 하지만 명징은 여전히 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에 분명히 드러나는 가치, 흐릿하지 않은 관계, 놓치면 안 되는 변화의 결을 읽어내는 힘. 그 힘은 미래를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한다.

확신은 편안하다. 그러나 명징은 불편하다. 안다고 말하는 대신, 더 본다. 틀림없다고 말하는 대신, 선명히 본다. 확신의 반대편에 서서 명징을 택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구하고 이르고자 하는 확신은 충분히 길고 깐깐한 명징의 과정에 의해서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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