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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영 Oct 30. 2021

우리가 삶의 터전을 영위하게 되는 ''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공통된 의견은 집이라는 것은  '안정감' 주는 곳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유년기  나는 일종의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가난이라는 특성에 기인할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 당시의 나를 바라보면 나의 '' 없다는 것에서 오는 결핍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의 집'이라는 것이 내포한 것은 '매달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매매로 구입한 ' 의미한다.


그 당시 나는 매달 월세를 내는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극화해서 표현해보자면 어느 순간 형편이 되지 않아 월세를 내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내쫓길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유년시절의 대부분의 추억이 담긴 이 공간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왜인지 모르게 일종의 불합리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러한 집에 대한 결핍 때문이었는지, 어린 시절 나는 집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을 가진 부모를 가진 나의 친구들일 것이다. 사실 우리 집이 자가라고 했을지라도 그것은 나의 부모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음에 결과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내가 생활하는 이 집이 다른 이의 것이라는 사실이 주는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인생 목표는 줄곧 내 집 마련이었다. 이러한 꿈을 가진 채 성장했고, 대학에 진학하여 서울에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 나에겐 결핍의 상징이자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그곳을 떠난 첫날에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15평 남짓한 개인 공간도 없었던 나의 집에서 벗어나 좀 더 쾌적한 기숙사로 이사를 왔음에도 한 일주일간은 내가 살던 그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었다. 그것은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공간 자체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라, 그 집에서 보낸 추억들을 이제는 멀리서 회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는 서울이라는 곳에 완전히 적응하였고 기숙사 생활에도 상당한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숙사라는 공간 자체도 나의 것이 아님에도 그러한 안정감을 느꼈다는 것에 의아스럽다. 그 당시 나는 서울에 갓 올라와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접했다. 과 친구들부터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피로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기가 다 빨린 채로 기숙사에 들어와 기절하는 날들도 많았다. 이러한 당시의 나에게 '기숙사'라는 독립된 공간은 상당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울고 싶은 날엔 펑펑 울기도 하고, 나를 속박하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음에 나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높은 안정감은 사정으로 인해 기숙사에 나와 몇 달간 고시원을 전전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전한 나의 공간이 확보된다는 단 하나의 장점이 나에게는 상당한 안정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실제로 기숙사 - 고시원 생활을 한 1년여간 나의 본가를 방문한 것이 손에 꼽는다.

 그렇게 5개월 남짓의 고시원 생활을 청산하고 그 이후에는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반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자취생활을 통해 나의 불안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나의 불안감은 어쩌면 집을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 공간의 부재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내가 만족감을 느끼는 부분 역시도 기숙사에서 느낀 것과 비슷하다. 온전한 나의 공간,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있을 때보다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더 큰 안정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홀로 섰을 때 더욱 강인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는 유년시절의 모든 것이 함축된 그 공간에서 나의 독립적인 공간에 오기까지, 불안에서 안정을 취하기까지의 나의 일련의 과정들은 필연적이라고 느껴진다. 마치 나의 불안의 원인이 '가난'이라는, 나의 집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신이 그 모든 일을 벌인 것 마냥 모든 것이 운명처럼 다가온다.


 앞으로 나의 집을 가져야겠다는 강박을 조금 내려둘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몸을 누이는 그곳이 자가이던 월세이던 전세이던, 설사 나의 공간이 독립적이던 그렇지 않던, 나의 불안감의 원인이 가난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나의 지난 삶들이 그렇게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준다.


앞으로 나는 어떤 집에서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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