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에 가까워지는 인생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았던 순간이 나에게 존재하였던가
인생을 살아옴에 있어서 대부분의 순간들을 줄곧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 라는 선망보다는 맹목적인 부러움에 가까웠는데, 이는 나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동력을 제공해줌과 동시에 끝없는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언제부터 누군가를 부러워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초등학생 때는 가정이 화목하고, 큰 집에서 사는 이들을. 중학생 때는 사회성이 좋고, 인기가 많은 이들을 고등학생 때는 마르고 얼굴이 예쁜 사람을, 대학교에 1학년 때는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는 똑똑한 사람을 최근에 들어서는 가정형편이 넉넉한 사람이 부럽다. 이러한 나의 부러운 감정들, 단순히 아 부럽다.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그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계속 생각하게 하고 결국엔 나로 하여금 깊은 박탈감, 절망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들은 단지 운이 좋은 것이다.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라며 자기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정말 인생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고 억울하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가진 것들을 내가 부러워하는 이유는 내가 운이 없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나는 단지 운이 조금 안 좋았을 뿐인데, 평생을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며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갖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하는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갈구하고 얻으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니, 왜인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나도 누군가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이를 운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나의 부러움의 대상인 그들의 노력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아하게 호수를 떠다니는 백조 조차도 실은, 그 물 밑에서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마냥 부러워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나도 '그들' 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던 것 같다. 근본적인 '가난'에서 비롯되는 부러움을 해결할 길이 없지만, 외적인 요소나 내적인 요소를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사회성이 좋고 인기가 많은 이들이 되기 위해, 아직은 인기가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성이 좋은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사실 유치원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는 내향적인 사람에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내향적인 모습이 어쩌면 나의 본성이라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내 안의 내향성이 밖으로까지 표출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말을 많이 하고 리액션을 조금 재밌게 해 준 결과 ' 말을 조금 웃기게 하는 애'로 인식이 박혔고 2, 3학년 때 학교 학생회 임원도 하고 여러 친구들과 두루두루 사귄 결과 사회성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
마르고 얼굴이 예쁜 사람. 외모와 몸매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편이라 고등학교 3학년 6월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총 25키로 정도 감량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다시 요요과 와서 비슷해졌지만, 내가 부러워하는 예쁘고 마른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일념이 엄청났던 것 같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느낀 것은 생각보다 예쁜 애들은 너무나도 많고 나는 화장을 해도 예쁘지 않다는 사실. 거울을 볼 때마다 현타가 와서 대학교 2학년이 되고 난 후에는 외모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동안 화장도 안 하고 후리 하게 하고 다닌 결과 고등학생 때의 나와 비슷해진 것 같다.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는 똑똑한 사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한 사람이 항상 부러웠다.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오히려 둔재에 가까운 사람이라, 수학과 같이 타고난 머리가 필요한 영역에 있어서는 약세를 보였는데 노력으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고나기를 똑똑하게 태어난 사람이 부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는 굳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과목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내가 선택한 전공이라도 소화할 정도의 재능을 보여야 한다는 것인데, 과 특성상 대부분을 논술로 시험을 보다 보니 글 쓰는 것에 큰 재능이 없는 나는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글을 쓴다. 뭐든 내 감정이든 굳이 학술적인 글이 아니더라도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쓴다.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쓰다 보니까 재밌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사람. 가정형편과 관련된 문제는 '운의 영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저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다. 물론 운이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한 기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이 안 좋았다는 표현 말고는 딱히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태어날 때 부자인 부모와 가난한 부모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가난한 부모를 선택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제 발로 불구덩이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인데. 내가 선택한 인생이 아니기에, 나는 이것을 '그냥 운이 안 좋았다'라고 표현하겠다. 여기엔 어떠한 원망도 담겨 있지 않다. 그저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니, 나의 인생을 꿋꿋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가난'이라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죽기 전에 꼭 해결해야 할 과업. 나의 부모는 가난했으나 나도 그렇게 살 거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내일도 오전 8시에 출근할 것이다. 몸이 힘들면 금방이라도 뭐든 그만둘 것 같은 나인데, 어쩐 일인지 두 달째 버티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출근일지라도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든데도 꾸역꾸역 나가서 돈을 벌고 있다. 이는 아마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다. 만약, 내가 돈을 벌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나는 그 자체로 쓸모를 잃은 것이다. 타고난 '가난'이라는 삶의 업보를 끊어내야만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소명 같은 것인데, 이를 외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삶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그럼에 나는 내일 출근을 한다. 내가 부러워하는, 어쩌면 나의 힘으로는 평생 얻지 못할 것을 얻기 위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그것에 가까워지는 삶, 어쩐지 고달파지면서도 동시에 초연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 아닐까라며 되려 담담해진다.
나의 부러움에 가까워지는 삶, 그리고 나의 부러움이 내 것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