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에 대한 죄의식
이 세상에서 부모라는 존재보다 양면성을 띄는 존재가 있을까.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 준 조물주이자, 나를 세상에 방치한 사람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를 이 세상에 뿌리내리게 해 준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감사함과 동시에 내가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원망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로 글을 쓴다.
나는 삶이 힘들 때마다 왜 내가 힘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상당히 억울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 아닌데,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태어나 세상에 방치된 것 같은 기분, 성인이 된 이후 앞으로 죽기 전까지의 모든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사람은 나다. 나의 우울의 근원인 이것들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서 비롯되기에, 나는 그들이 조금은 원망스럽다.
물론 한 인간이 태어나 어렸을 적엔 부모의 품 안에서,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부모의 품에서, 삶의 모든 책임을 누군가에게 이양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인가 보다.
삶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 잘 지지 하고 있다가 놓아버린 날, 나는 그들이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원망스럽다.
왜, 나를, 내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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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도 부모이기 전에, 사람이고 누군가의 자녀였던 사람들로 자신들의 자녀와 함께 성장하는 미완성의 존재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였던 사람은 없듯이, 그들도 나와 함께 성장했을지도. 그럼에도 나는 태어남에 의해 고통받는다. 부모에 대한 원망도 ‘태어남’에서 기인한 것이다. 나를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기에. 그들이 나의 태어남으로 인해 삶의 기쁨과 동력을 얻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데 난 태어남으로 인해 무엇을 얻었을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 일단 태어났으니 냅다 살고 보자 이런 것들.
그래도 나는 나의 부모님의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나라면 키울 능력이 되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려운 형편에도 두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그들이 나의 부모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의 원망엔 죄의식이 동반한다. 그들도 어쩌면 태어남을 원망한 한 사람의 자녀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고통받는 생명체는 나하나로 족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에. 내게는 고통의 시작이었던 태어남이 그들에겐 축복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일까. 뭐든 부러운 것은 매한가지이다.
아이가 태어난 것에 온전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나는 그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아서, 부모가 되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부모는 될 수 없더라도 이 땅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주어진 몫은 제대로 해내야 하는데, 이 마저도 마음 같지 않다. 삶은 고통이다 라는 게 뇌리에 박혀서 그저 누군가에게 하염없이 기대고 싶은 날이다.
나도 언젠가는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부모가 나를 얻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알고 싶다. 그렇다면 나도 죽을힘을 다해 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누군가의 삶에 기쁨이 되는 존재였다는 것에 대한 감동에 휩싸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