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로그
그가 나를 알기 전부터 여자친구가 있었으니
그렇다면 내가 바람 상대? (03편 참고)
머리에 피가 쏠린다.
잠깐 피를 돌게 하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해 본다.
꼬꼬무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2살부터 24살까지 만났던 남자친구.
내가 만났던 사람 중 외적인 건 가장 별로였지만
난 여하튼 그를 좋아했다. 사랑도... 했다.
그를 알게 되고 순간적으로 팍! 뭔가 튀었다.
그도 그랬단다.
몇 번의 데이트와 술자리 끝에
우리는 어느새 사귀고 있었다.
아마도 내 성격을 받아준 게 가장 컸다.
내로남불.
고집불통.
개사이코.
왕싸가지.
애정결핍.
나를 칭하는 4글자 단어들을 꼽자면 뭐 이렇다.
(오! 진짜 별로다!)
처음에야 대충 베일에 싸서 감출 수 있지만
몇 마디 나눠보면 결국엔 들통날 수밖에 없는 성격.
그래서 안 감추기로 했다.
맘껏 드러냈는데 그럼에도 내가 좋단다.
하루에도 100번씩 만약에 테스트를 하고,
아는 오빠들과 술 마시러 가면 어떻게 할 건지
반응을 묻고,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면 어쩔래?
이런 시답잖은 질문들로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위에 말했듯 나는 애정결핍이 좀 있는데
그걸 저런 질문들로 채우고 싶었다.
근데 내 애정결핍의 독은 콩쥐의 독과 같아서
두꺼비가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줄줄 새어나갔다.
완벽히 채울 수 없었단 이야기다.
그러니 더 들들 볶았고 상대는
뜨거운 팬에 준비 없이 입수된 들깨처럼
그저 달달 볶이게 뒀다.
100일, 200일, 300일 그리고 1년.
몇 번의 고비도 있었지만 잘 사귀었다.
(눈물의 재회 같은 일들이 있었는데
아마 걔의 인생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실수였을 거다.)
그맘때 그는 오로지 나를 위해 내가 사는 지역에서
아주 좋지만은 않은 환경으로 일하고 있었고
나는 탱자탱자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이었다.
겨우 한 살 차이인데
돈을 버는 사람이냐 쓰는 사람이냐로
일상이 달라진 거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누군들 얼마나 이해하리.
나는 그의 힘듦을 전. 혀 공감하지 못했다.
퇴근 후 지친 목소리로 통화하는 게 서운했고
피곤하다면서 캔맥주 하나 깠다는 말이 싫었다.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생긴 회식에는
히스테리를 부렸고
퇴근 후 친구와 함께 헬스장을 다닌다는 말에는
정말 개지랄을 떨었다.
안 그래도 만날 시간이 부족한데 헬스장?!
(오! 나 진짜 진짜 별로다!)
그때는 뭐 나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적극적으로 변호할 생각은 없고
그저, 그런 곳에
에너지를 쏟을 시간이 남아돌았을 뿐이다.
가끔 시계를 보며 시침, 분침이
화살같이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냥 내 시간이 남아도니 그 화살이 걔한테 간 거다.
그런 와중에
상당히 고달팠을 그에게도 잠깐의 짬이 생겼다.
나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즐기는 시간!
내가 해외여행을 가게 된 거다.
아마 신데렐라가 12시가 되기 전까지
신나게 즐긴 것처럼
그는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놀지 않으면
더 이상의 자유는 누릴 수 없고
심술이 덕지덕지 아주 못된 계모+언니들을 합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성공했다.
환승연애할 상대를 찾았다.
나의 가스라이팅으로 자신을 좋아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믿었을 텐데,
본인을 좋다고 하는 여자를,
그러니까 유리구두를 찾은 거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온 나는
면세점에서 산 선물들을 들고
나의 신데렐라를 찾아 나섰다.
으흠 유리구두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데, 내가 준비한 유리구두는
이제 그의 발에 더 이상 맞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년간 혹독하게 자신을 깎으며
새로운 유리구두를 신을 준비를 해왔던 거다.
그걸 몰랐던 나는 울며불며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아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수를
또 하고 싶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서였는지 여지는 남겼다.
보고 싶을 때 와주겠다고.
나는 여러 번은 안 와줄 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참았다.
진짜 제일 보고 싶을 때 말하려고.
참는 건 힘들었다.
그 속 쓰림을 달래려 더 큰 속 쓰림을
자주 소환하곤 했다. (친구와 술을 먹었단 뜻이다.)
그날도 역시나 그리운 마음에
그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봤을 뿐인데
어! 환승연애 흔적을 찾았다.
아무리 흐린 눈을 하려고 해도 빼박이었다.
난 당장이라도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친구가 말렸다.
술을 진탕 마셨는데 이번엔 술이 졌다.
2년 사귄 남자친구의 환승연애 사실은
너무나도 속이 쓰렸다.
막걸리를 진탕 마신 다음날보다도
토와 머리아픔이 동반된 술병보다 더 힘들었다.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했던 거 같다.
연락을 안 했으니까.
근데 또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됐던 것도 같다.
후회하며 연락올 거라고 생각했으니.
(이게 꽤 오래전 일인데 아직까지 연락은 안 왔다.)
나는 여기서 딜레마를 느꼈다.
자, 이제 그럼 누가 나쁜 거지?
사귀는 동안 힘들게 한 나일까, 끝이 비겁했던 너일까.
환승연애를 하게 만든 내 잘못일까,
솔직하지 못했던 너 잘못일까.
최근 이 생각의 종지부를 찍었다.
지금까지 이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건,
나도 내가 나빴다는 걸 인정하는 거란 걸.
직접적으로 용서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난 이미 용서했다.
그리고 너는 그냥 날 이미 잊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