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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Sep 19. 2023

나는 곶감이 되고 싶었다.

 우리 집 냉동실에는 돌덩이가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그 돌덩이의 정체는 꽝꽝 얼린 음식들로, 대체로 다 어디선가 받아온 것들이다. 누군가 나눠준 고구마, 감자, 단호박 같은 구황작물이 있고, 종류가 다양한 떡이 있으며 냉동실 가장 깊숙하고 구석진 곳에는 감말랭이와 곶감… 그래, 곶감이 있다. 애증의 곶감. 어렸을 땐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다 커서는 먹고 싶지도,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것. 나에게 곶감은 아픈 손가락이다. 좋아하지도 않지만, 싫어할 수도 없는 무엇이다.


 어렸을 땐 곶감을 마냥 좋아했다. 달짝지근하고 말랑한 곶감.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으나 가족, 친척 등 가까운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만큼 곶감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남달랐다. 명절이 다가와 마트에 가면 곶감이나 과일 선물 세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엄마한테 곶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다. 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곶감을 샀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서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먹고 싶을 때마다 먹을 수도,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큰 곶감 선물 세트를 받았던 명절을 기억한다. 우리 집에 선물세트로 곶감이 들어온 걸 처음 목격한 날이라 그 기억은 짙게 남아있다. 나는 환호했다. 보통 때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감질나게 겨우 한두 개 눈치 보며 집어먹던 (몇 없는)곶감을 드디어 원 없이 먹어 볼 수 있다는 기대로 마음이 잔뜩 부풀었다.

 그러나 곶감은 내 손 한 번 닿아볼 새도 없이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다. 어쩌다 방문한 그리 가깝지 않은 친척 손에 내 소중한 곶감이 쥐어진 것이다. 엄마의 만행이었다. 한사코 사양하던 친척에게 “우리 집엔 먹을 사람 없어 가져가~” 거들던 할머니의 목소리도 내 두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무심하게 말하는 엄마와 할머니를 원망의 눈초리로 봤지만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누구보다 알아줬으면 하는 이들에게 내 마음이 가닿지 않는 상황은 익숙했으니까. 내가 얼마나 곶감을 좋아하는지 알면서.. 곶감, 곶감 얼마나 노래를 불러댔는지 다 알면서..

 보일러를 떼지 않아 찬기만 가득했던 방에 들어가 옷소매로 눈물자국을 찍으며 조용히 설움을 삼켰다. 믿었던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배신한 것처럼 아팠던 날. 눈물이 뜨거울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실감했다. 한 살 터울의 쌍둥이 언니들과 성장기를 함께 겪느라 더 그랬을 테지만, 먹을 거 하나에도 마음이 곧잘 상하던 시절이었다.

 

 조금더 자란 뒤에는 곶감 사달라는 노래를 열 번쯤 부르면 한 번 정도 사주긴 했다. 그게 곶감이 아니라 감말랭이였다는 게 문제지만. 감말랭이는 곶감처럼 이름이 근사하지도, 맛있지도 않았다. 달달하고 쫀득하고 속이 촉촉한 곶감에 비하면 감말랭이는 떫고 질겼으며, 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져 모양도 제멋대로 들쑥날쑥이었다.(내가 먹었던 감말랭이는 항상 그랬다.) 감말랭이는 저렴했지만 곶감은 비쌌다.

 꼭 들어맞는 크기의 네모 한 칸씩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곶감과 달리, 감말랭이는 언제나 볼품없이 큰 플라스틱 통 안에서 한꺼번에 담겨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서로 들러붙어있었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감말랭이는 결코 선물세트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곶감 대신 먹었지만, 어쨌든 감말랭이는 곶감이 아니었다. ‘곶감 아닌 것은 곶감이 될 수 없다’. 그 단순한 사실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런 감말랭이가 꼭 나 같았다. 늘 사랑받고 싶어서 무언가가 되려고 전전긍긍하지만 결국 나 아닌 무언가가 될 순 없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나. 아무리 안간힘을 써봐도 크게 바뀌지 않을 나의 위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아들 같은 딸이 되라고 말하는 어른들. 그런 걸 생각하면 나를 감말랭이 취급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나는 곶감이 되고 싶었다.

 

 이따금씩 감말랭이를 갖다주면서 “곶감 대신 사 왔어. 이것도 곶감 비슷한 거야.” 같은 말로 생색내는 어른들이 미웠다. 아무 때나 아들 대신이라며 나를 여기저기 함부로 들이미는 손들이 떠올라 아팠다. 진짜 곶감 취급은 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쉬워할 거면서.

 

 자본주의의 쓴맛을 어느 정도 알아버린 지금의 나는 그때의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때마다 비싼 곶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생떼가 얼마나 곤란했을지 같은. 사주고 싶어도 사줄 수 없었던, 그 사정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어 답답했을 어른들의 세계를 어린 나는 몰랐겠지만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그때의 어른들은 여전히 곶감과 감말랭이를 보면서 나를 떠올린다. 잊을만하면 곶감과 감말랭이를 들고 찾아오는 엄마에게 나는 짜증 낸다.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할 땐 사주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왜 챙겨주는 척하느냐고. 이젠 감말랭이도, 곶감도 다 싫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꿋꿋이 내 품에 곶감을 안겨주고 돌아간다. 그렇게 받아온 곶감에는 한 시절 우리의 감정이 모두 담겨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버리지 못한다.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곶감을 냉동실에 방치한다.

 수많은 음식 덩어리에 밀리고 눌려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는, 음침한 구석 어딘가에 자리 잡은 곶감. 그러나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곶감. 화석처럼 굳어버린 곶감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다. 찬기로 가득한 냉동실 문을 다시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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