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행위에 자주 피로감을 느낀다. 너무 많은 말을 배설하듯 쏟아내고 돌아온 날이면 특히 더 그렇다. 어디서나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 말에 대한 나의 강박은 아주 오래전부터 발현되었는데, 스스로를 증명하거나 지켜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점차 두드러졌다.
아무리 부당한 일을 겪어도, 억울함을 호소해도 그게 왜 부당한지 나의 억울함이 왜 정당한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유년기에 체득했다.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약자와 소수자의 말은 어디서든 자주 묵살되었기 때문이다. 내 말이 공기 중의 먼지보다 가볍게 여겨지고 누군가의 입김 한 번에도 보잘것없이 흩어져 버리는 광경을 여자이면서 어린이였던 나는 수없이 목격하며 자랐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만한 건 나이를 먹을수록 내 말을 들어주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났다는 것. 물론 그마저도 말을 잘해야만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래서인지 유창한 언변을 가진 여자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동경심과 슬픔이 공존한다. 말이나 글에 대한 집념을 가진 그들에게서 감히 나를 본다. 삶을 향한 나의 짙은 비애를. 때때로 ‘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마해야 하는 무기가 되기도 하므로. 그런 삶을 걸어온 이들에게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품게 된다.
말이든 글이든 내 주장을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관철시키기란 쉽지 않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발화할 때 내가 신경 쓰는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내 말에 심한 논리적 비약은 없는지, 혐오나 차별적인 표현을 쓰고 있진 않은지, 누군가를 배제하는 말을 일삼고 있는 건 아닌지 등. 쓰고 말하는 자아가 강해지면서 신경 쓰는 게 많아졌고 종래에는 글 한 편, 누군가와의 대화 한 번에도 에너지가 쉽게 바닥을 치는 형국이다.
때문에 말에 대한 회의감도 자주 찾아온다. 나라는 사람을, 현재의 내 상태를 끊임없이 타인에게 설명하고 증명해야 할 때. 내 말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가닿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내 감정을 도저히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일순간 삶은 공허해지고 몸은 침잠한다. 침묵하고 싶은 마음만 남는다.
듣고 싶은 말보다 듣기 싫은 말들이 범람하고, 하고 싶은 말보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삶. 하루에도 몇 번씩 형식적이고 무례한, 때론 폭력적인 대화에 노출되는 나의 직업은 서비스직이다. 일상이 버겁다. 괴롭다. 권태와 두려움 사이를 수시로 오가느라 몸과 마음은 회복할 틈도 없이 소진되어간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좋은 대화’를 향한 갈망이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소통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으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좋은 대화’란 무엇일까. 좋은 대화를 떠올릴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양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말만 하고,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걸 대화라고 하진 않는다.(차라리 그건 강연에 더 가깝다.) 발화자인 동시에 청자가 될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서 여러 사안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 나는 그런 대화를 ‘좋은 대화’로 여긴다. 크고 작은 주제를 가리지 않고도 ‘좋은 대화’란 얼마든지 가능하며 누군가와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눈 날이면 나는 반드시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좋은 대화’는 삶을 고양시킨다.
실제로 좋은 대화를 나누려면 그만큼 갖춰야 할 게 많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경청하겠다는 태도, 밀도 높은 대화에 쓰일 체력 등. 그러나 언제나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는 않는 법이고, 나는 압도적 내향인이라 약속 한 번을 나갔다 돌아오면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한 달쯤은 쉬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좋아하는 지인들과 밀도 높은 대화를 자주 나누고 싶지만, 동시에 매 순간 말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다. 이 반복되는 모순이 나를 말을 쏟아내게 했다가 다시 침묵으로 도망치게 한다. 말과 침묵. 이 양극단을 오가는 일에서 나는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매일 팟캐스트를 듣는 건지도 모른다. ‘좋은 대화’를 향한 열망은 큰데 내가 가진 체력으로는 만족할 만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팟캐스트에는 분야별로 좋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프로그램이 무궁무진하며 심지어 그들의 대화를 합법적으로(?) 엿들을 수 있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땐 <이동진의 빨간책방>과 <책읽아웃>을,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땐 <김혜리의 필름클럽>을, 내가 추구하는 형태의 삶을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할 땐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와 <비혼세>를 듣는다. 웃음이 필요하거나 시시콜콜 수다 떠는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땐 <밀림의 왕>, <영혼의 노숙자> 등을 듣는다. 최근에는 앎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싶어서 유료 오디오 매거진인 <정희진의 공부>도 구독하기 시작했다.
읽거나 보거나 잘 때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내 일상의 틈을 이렇게 다채로운 팟캐스트로 채운다. 팟캐스트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굳이 애써서 말할 필요도, 침묵해도 된다는 점이 나를 안심시킨다. 필요한 순간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도 받는다. 그들의 말 뒤에 숨을 때 비로소 나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 움직이는(것만 같은) 말을 듣는다.